본문 바로가기

연재완료/신학; 신앙

[미망이의 신학 서재] 문예비평적 성서해석, 창조신앙에 풀어쓰다

입력 : 2017. 07. 03 | 지면 : 2017. 09. 26 | A24


미망이의 평점

가독성: ★★★

내용: ★★★

소장가치: ★★☆

보너스점수: ★

평점: 총 9점


평점 기준

가독성

① 한 번에 읽기 쉬움 3점

② 두 번 읽어야 이해가 됨 2점

③ 세 번 읽어야 이해할 수 있을 경우 1점

④ 세 번 읽어도 어려운 경우 0점


내용

① 독서 후 다른 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함 3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

② 단순한 새로운 정보의 습득 2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이 없음)

③ 새로운 정보 없이 기존 정보를 재편집 했을 경우 1점

④ 텍스트 오류 발견 시 0점


소장가치

① 평생을 두고 함께 갈 텍스트 3점

② ①의 경우에는 해당 되지 않지만 지인에게 한번은 추천할 텍스트 2점 

③ 도서관에서 빌려볼 만한 책 1점

④ 안 봐도 그만인 텍스트 0점


보너스 점수

저자에 대한 호의감이나 감동 외에 기타 점수 1점


창조신앙의 복음, 창조신앙의 영성
국내도서
저자 : 왕대일
출판 : 대한기독교서회 2016.03.10
상세보기



저자의 에세이라고 해야 할지 주석본문(텍스트)으로 이해해야 할지, 문학적 분류가 애매했다. 얼핏 보면 주관적 성격이 많이 배제 된 주석본문일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객관적 성격이 배제 된 설교 같은 ‘에세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본문의 성격을 분류한 이유는 어떤 종류의 본문인가에 따라 평가가 상반되기 때문이다.


   본문이 신학적 주석서라면 필자는 분명 본문에 나온 저자의 견해와 다른 부분을 찾고 거기에 있어서 반박을 할 테다. 저자의 에세이라면 본문 안에 나타난 감성과 그 감성에 대한 필자의 느낌이 주된 서평의 내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본문을 신학적 주석서이기 보다는 에세이에 더 가까운 본문이라 하고 서평을 적어보고자 한다.


◇ 가벼운 글, 무거운 내용

   이 본문을 에세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본문 내에 있는 신학적 부분이 적어서라기보다 대부분 장(chapter)마다 마무리 글이 저자의 감성,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저자가 성서에서 발견한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가 그 끝을 장식하고 있기에 에세이라고 판단했다. 이러한 저자의 에세이는 전체적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보통 에세이란 저자의 주관적 생각과 감성적 표현이기에 내용이 가볍기 마련이다. 이 본문은 전문서적으로 생각할 만큼 무거운 내용을 다루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무거운 내용을 에세이가 가지고 있는 가벼운 형식의 글로 다뤘다는 것인데, 다시 말해 글은 읽기 쉽고 편안하지만 그 내용은 결코 가볍거나 쉬운 주제가 아니었다.


   지난번에 저자의 ‘기독교 경학과 한국인을 위한 성경해석’을 읽고 ‘대가(大家)라고 불리는 사람의 글쓰기란 것이 이런 것이구나’를 느꼈다면, ‘글 쓰는 이에 따라 무거운 내용을 조금은 더 가볍게 쓸 수 있구나’라는 것을 잠시간 이 본문이 배우게 했다.


◇ 네피림의 해석: 설교 작성 시 참고자료로서의 활용 가치

   개인적으로 고등비평이라고 하는 역사비평, 문헌비평과 같은 방법을 좋아한다. 그러나 한국교회 현실에서 이러한 비평적 방법을 설교에 녹이는 일은 엄청난 도전이다. 그렇기에 신학교에 있는 많은 이들이 ‘신학교와 설교 현장은 거리가 멀다’라고 자주 외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본문의 맥락은 주로 문예비평으로 성서를 해석하고 있으며, 그리고 이 중 많은 부분은 설교현장에서 보다 풍성한 자료로 쓰일 수 있다고 판단한다.


   일례로 네피림에 대해서 설명할 때에는 “여기 네피림(םילפנ)은 히브리어 나팔(לפנ)에서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경우 네피림은 ‘추락한 자’가 됩니다. 네피림은 오르려다가 추락하고 만, 하나님과 겨루다가 타락하고 만 자들을 가리킵니다(190쪽)”와 같이 특정 용어를 대중에게 설명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으며, 동시에 “창세기 4:1에서 우리는 가인을 낳은 하와에 당당함에 주목해야 합니다…… ‘내가 남자아이를 얻었다’라 말한 하와의 고백은 히브리어로는 ‘내가 생산(יתינק·카니티)하였다. 남자를’ 입니다. 하와가 자기 자신을 생명 생산의 주역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 가면 족보에서 아이를 낳는 주체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입니다(창5:3-5)…… 창세기4:1-2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인, 아벨 이야기에서 아이를 배고 낳는 주체는 단연 여자였습니다. 하와가 임신하고 출산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하와는 자기가 배앓이해서 낳은 자식들 때문에 엄청난 시련을 당했습니다.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아담의 족보는 그런 여자의 이야기를 남자의 스토리로 바꿔 놓았습니다(107, 113쪽)”와 같이 특정한 단어에 대한 설명 뿐 아니라, 전체적 문학적 구조로도 성서를 접근하는 이러한 해석과 이 해석을 쉽게 풀이해서 설명하는 텍스의 내용은 충분히 설교 자료로 참고할 만한 콘텐츠라고 판단했다.


◇ 홍수재앙과 에녹 이야기: 모든 콘텐츠를 설교로 활용할 순 없다

   그렇다고 모든 콘텐츠가 설교 자료로 유용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는 “홍수재앙에 대한 기억은 고대 서아시아 지역에 널리 유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창세기의 그것처럼 홍수재앙을 땅에 만연한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으로 보는 것은 없습니다(222쪽)”라고 했지만 ‘이것은 명백한 오류’다. 왜냐하면 서아시아는 아니지만 아즈텍의 신화에서는 창세기에서와 같이 홍수의 원인을 신을 제대로 섬기지 않은 인간의 죄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 태양인 물의 태양 시대에 사람들이 몹시 사악해져 신 섬기기를 소홀이 하자 신들은 진노했다. 그리하여 비의 신 틀랄록은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기로 했다. 그렇지만 그는 타타와 네나라라는 착실한 부부를 어여쁘게 여겨, 홍수가 날 것을 미리 알려주었다(존 비얼레인, 『세계의 유사 신화』 197~198쪽).”


   이처럼 저자는 구약학자이면서도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기 위해 그 논거를 의도적으로 흐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에녹’에 관한 설명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에녹이 365년 동안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은. 그리고 그 365라는 숫자가 우리네 일년살이의 날수와 같다는 것은 에녹의 삶이 신앙과 구별되지 않았다는 깨달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365라는 숫자는 일상을 암시하는 비유입니다”라고 주장하는데 바빌론 포로기 시절의 유대인들의 달력은 태음태양력을 사용했기에 1년을 365일이라고 상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저자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일종의 논거들을 변형을 시켰다. 이러한 부분들은 이 본문의 아쉬운 부분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평신도의 신학이 발달된 현재에 잘못 사용하면 오히려 자료를 사용하지 않은 것보다 못한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렇기에 본문에 있는 자료를 설교의 용도로 사용한다면, 간단한 신학적 상식은 다시 한 번 재검토 한 후에 사용해야 한다.


◇ 이번에도 대가에게 한 수 배울 수 있던 시간

   구약논단 Vol.15(2009)에 실린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연속과 단절(발제자: 이경숙)’이라는 글을 보면 구약과 신약을 보는 다섯 가지 유형을 분류하고 있다. 첫째는 거절모델이며, 둘째는 대조모델이며, 셋째는 그리스도 증거의 모델이며, 넷째는 상대화와 선별의 모델이며, 다섯째는 대화의 모델이다. 이 다섯 모델을 보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거절모델은 구약은 폐지됐기 때문에 기독교 경전에서 빼야 한다는 주장이다. 구약성서는 유대교의 경전이기 때문에 유대 민족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더욱이 그 내용이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라는 주장에 근거해, 구약성서가 기독교인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므로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입장은 기독교에 아주 뿌리 깊고 오래된 것으로, 대표자로는 마르키온(Marcion)이 있다. 그러나 초대 기독교는 마르키온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구약을 자신들의 정경으로 집어넣었다. 그럼에도 역사는 늘 반유대주의와 구약성서 거부 움직임은 그치지 않고 계속 됐다.


   둘째, 유형은 대부분 기독교 신학자들이 속해 있는 대조 모델이다. ‘엣 것-새 것, 유대인-예수, 율법-복음, 부정-정결, 보복-은총’ 등으로 대조시키는 모델이다. 이는 바울 서신에 주로 쓰이는 모델이기도 하다. 이 모델에 의하면 구약성서는 폐지하면 안 되고 붙잡아야 한다. 복음이 그와 대립해 있는 율법을 통해서만 뚜렷하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약간 다르긴 해도 불트만도 이 모델에 속하는데, 계약, 하나님 나라, 하나님 백성의 개념을 분석하면서, 이스라엘이 좌절되는 과정 속에서 종말론적 희망으로 변해간다는 점을 강조한다. 율법은 인간을 좌절로 인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존재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 유형은 그리스도 증거 모델이다. 주로 루터를 중심으로 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이에 속한다. 이들의 주장은 구약은 그리스도가 무엇인지를 말했고, 신약에서 그가 누구인지를 말했다고 보는 견해다.


   넷째 유형은 상대화와 선별 모델인데, 구약성서가 전반적으로 긍정적이지만 신약은(예수 혹은 그리스도적인 것)은 더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진화모델이기도 한데, 이 모델에 의하면 구약은 신약을 위한 예비적 서술이고, 신약은 계시의 완성이자 실제라는 것이다. 이 모델 역시 많은 신학자들이 속해 있다.


   다섯째 유형은 대화 모델이다. 여기에는 주로 80년대 이후 독일의 학자들이 속해 있다. 이들에 의하면 첫째에서 넷째의 모든 주장은 기독교 우월주의가 숨겨져 있기 때문에 거부해야 한다. 구약은 신약을 위해 작성되거나 혹은 그 눈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볼 때 구약 저자들의 원 의도를 오해 할 수밖에 없다.


   필자가 이러한 다섯 가지 유형 중 가장 선호하는 것은 마지막 대화의 모델이다. 저자의 글을 보면 왠지 대화의 모델이기 보다는 상대화와 선별의 모델을 추구하는 거 같다. “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사용하신 재료가 땅의 흙인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를 비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창세기 2:4-25의 창조신앙을 읊는 자는 누구나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 퍼뜩 서야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마5:3) 문리역 한문성경은 이것을 허심자복의(虛心者福矣)라고 바꿔 말합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을 마음으로 비우는 것을 읽습니다…… 마음을 비우는 자만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고, 마음을 내려놓는 자만이 하나님이 살라고 주신 땅에서 제대로 손님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32쪽).”


   이와 같이 저자는 구약의 이야기를 단순하게 구약의 관점에서만 보지 않고 계속해서 신약과 연결 된 해석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저자의 해석은 분명 필자와 다른 형태의 해석이다. 필자에게 ‘틀리다’, ‘낯설다’와 같은 느낌을 주기보다는 ‘아 이런 해석도 있고, 내 관점이 결코 100% 맞는 것은 아닐 수도 있구나’를 느끼게 한다. 무(無)논리적으로 단순하게 신-구약의 성구를 맞추려고 하기 보다는 나름대로의 해석학적 원리를 가지고서 둘 사이를 연결하려는 모습이 본문에서 종종 발견되기에 그렇다. 비록 본문이라는 한정된 공간이긴 하지만, 저자에게 한 수 배운 듯해 본문을 읽는 내내 독서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또 다시 저자의 본문을 읽으며 독서의 재미를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