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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신학; 신앙

[다시 쓰는 은혜사] <5> 무너진 공간. 서서히 빗장을 연다는 건

입력 : 2018. 09. 16 | 수정 : 2018. 09. 17 | A26

 

다시 쓰는 恩惠史, 교회편: 나는 어디로 가나 <5>

 

스스로도 참담함을 느껴,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몰랐다. “네가 왜 거기 있느냐!” “목사님…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니고, 가자고…” 영적 전쟁에서 졌다는 듯, 참패한 얼굴로 고개 숙이며 통화를 마쳤다.

 

1시간 소요된 것으로 기억한다. 비를 맞는 자신을 그려 보라기에 거대한 동그라미에 빛이 퍼져가듯 줄을 그어 놓고 “하늘에서 바라 본 거예요.” 퉁명스레 대답한 병원에서 낯익은 이질감을 느꼈다.

 

이질감은 교회에서 자주 느끼곤 했다. 네 차례 교회를 나온 걸로 기억한다. 쓰나미 같던 방송 일에 좌절을, 말 안 듣고 개기는 주일학교 보조교사에 분노를, 삭히고 삭혀 감정 처리 방법을 몰라 절망을. 어금니 물고 주일예배를 째버렸다. 막 고등학교 입학한 뜨거운 순복음 신앙인이었으니, 인생 처음으로 타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린 건 이질감에서 비롯한 충동이었다.

 

소설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건, 문학적 기교를 알아보지 못한 탓이기도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질감을 극복하지 못한 원인도 크다. 이질감의 정점은 학생회장 파면 사태였다. 학생회 문제가 곪다 못해 터진 것이다.

 

인생 처음 타 교회서 드려 본 주일예배, 인생 처음 여럿이 지적한 내 잘못은 ‘하체가 드러날 듯한 부끄러움’을 낳았다. 인정하기 싫었다. 끝까지 감정과 행동에 일일이 해명했다. 가뜩이나 출석하던 학생도 없던 마당에, 찬양팀에 누구를 투입시킬지 싸우다 회장 자격도 없단 말에 흥분하고 말았다.

 

왜, 그 때 교회를 나오지 않았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신학생도 아닌 마당에 교회를 그만 다니고 싶었다. 상심한 채로 저녁, 무릎 꿇고 교회에서 통곡했다. 주님은 다시금 교회 다닐 힘을 주었고, 나는 교회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땐 응답이라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교회는 이미 내 삶을 형성하던 토대였다. 어떻게 토대를 버리겠는가.

 

착각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말은 유일신 하느님일 테지만, 행동은 단일신 하느님이었다. 학교로 걸어가던 길을 ‘복음길’로 명명해 부처상이 세워진 석재 공장을 향해 ‘무너져라!’ 외쳐댔고, 괜히 심술이 나 절을 향해 “예수님 만세!”를 질러댔으니(이 자리를 빌려, 사죄드립니다).

 

철옹성 같던 내면의 세계를 신앙생활이란 양식으로 지켜내려다 보니, 반 아이들과 가끔 신앙 문제로 부딪히곤 했다. 항상 읽어 내려가던 성서가 누군가에 의해 버려져 있어, 위험을 무릅쓰고 성서를 도로 찾았다. 가슴에 품고 눈물을 흘렸다.
십자가를 지는 예수/범접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알라보다도 더 친근한 예수를 믿었다.

 

 

축사, 영안, 천사, 마귀……. 영과 세속을 구분하던 이데아는 우울증 환자로서 더 나아질 거란 공간적 인지부조화를 낳았다. 포로기 때 기록된 제 2이사야에서 시대적 상황과 전혀 다른 하느님의 뜻이 선포되었으니, 더욱 구약을 좋아했고 엄격한 신 개념을 삶에 곧이곧대로 적용하고 말았다.

 

그러다 이데아 세계관도 금이 가버렸다. 교회를 나오기 전 근원적 물음, 교회서 일하다 교회로 온 전화에서 말이다. “담임목사님을 섬기고 싶은데, 좋아하는 음식 아세요?” “… 잘 모르겠습니다. 한 번 여쭤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무려 10년 동안 함께하면서도 담목이 좋아하는 음식조차 모른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곰곰이 필름을 되돌려보면, 청년학생들하고도 인간애로서 교제도 못했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나란 존재는 과거사에 빠져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가수의 노래를 접했다. 한 여성이 좋아하는 남자에게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라던 달콤한 노래였다. 죄악시 된 가요를 접한 순간이다.

 

물밀 듯 들어오던 세속 문화를 접하며 교회 밖 풍경이 어떨지 궁금했다. 미지의 세계. 불안. 두려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질감은 여전했지만 친근하던 윤하 누나에게서 타자의 향기를 느꼈다. 여전히 내 스타일 범주일 테지만 조금씩 이질감은 허물어졌고 어느덧 죄라는 전염병이 돌 것만 같던 세상이, 세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한 걸음, 내던져진 나 자신을 감싸던 빗장을 서서히 열었다. 하나 둘, 주위의 사람들이 조명으로 비춰졌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바라보게 된 것이다. 기독교 용어도 차츰 일상 언어로 바뀌었고, 평범한 여자 아이돌 빠돌이가 되고 말았다.

 

선배와 함께한 빨간 라면/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고마운 분이다. 설명은 여기서 줄이고자 한다. 말이 길어질 것 같다.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방문했다. 가장 존경하던 목회자였던 조용기 목사가, 노쇠한 늙은이가 돼 복음성가 1장, '사랑하는 자여'를 부르자 울컥했다. 한때, 한국 교회에 한 획을 긋던 그분이, 이제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자가 되어버렸으니.

 

 

누군가는 묻는다. 내게 하느님은 어떤 존재냐고. 교회를 나와 신앙을 버렸으니, 이제 그 분과도 끝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여전히 그 분은 내게 유일한 야훼 하느님이다. 다만, 고운 법복이 트렁크 팬티로 바뀌었을 뿐이다.

 

13년이란 짧은 여정을 마치며, “나는 어디로 가나”라고 묻는다면. 나는 나에게 이렇게 답하고 싶다. “미래를 향해, 용기를 가지고 내일로 걸어가는 거야.”

 

“우리 어디까지 갈는지

어떻게 될 건지 나는 몰라도

겁먹진 않을래요

Candy Jelly Love”(러블리즈, 2014)

 

 

신앙고백문을 재확인하고 오른 남산/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 당연한 교훈을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어디로 가나,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미래를 향해, 용기를 가지고 내일로 걸어가는 거야." 이 사진을 찍고, 다음 날. 박근혜라는 새로운 우상이 허무하게 스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