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재완료/러블리즈덕질일기

[아르키메데스의 점] 나의 세계를 넘어 너에게로 달려간다

입력 : 2018. 12. 15 | 수정 : 2018. 12. 16 | C8-9



부제: 어떻게 존재는 악을 통해 고통을 주고, 악을 상쇄하는가?

정규 2집, R U Ready? WoW!


여전히 우리 사회는 갈등을 빚는다. 광화문 광장에 서면 온도차를 느낀다. 같은 국민임에도 마치 다른 세계를 살 듯, 서로 다른 언어를 주고받으며 다른 시각, 초점, 생각, 자료로 살아간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우리는 여전히 이데올로기 속에 산다. 탄핵 뿐 아니라 남성과 여성, 노동자와 사용자가 전면에 등장해 끊임없이 갈등한다. 얼굴을 붉히며 멀리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정치 혹은 종교와 사회적 쟁점이 가정과 학교, 집단에 들어온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회적 갈등에서 개인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한들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는다. 지켜야 할 진리처럼 사람마다 마음 속 자리 잡은 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무언가는 하나의 벽처럼 작동한다. 이웃이 내게 다가오면 그 벽이 작동해 더 이상 가까이 올 수 없는 것처럼.


러블리즈 정규 2집 ‘R U Ready?’가 발표되었다(2017. 2. 26). 사랑 3부작 R U Ready? 타이틀 곡 ‘WoW!’는 닿지 않는 세계에서 사랑을 마음으로 곱씹는 소녀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WoW에 담긴 의미를 곱씹어보면, 사회 구성원인 우리와 소녀는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서구 사상의 한계, 동일자 논리

제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근대 사회는 한국보다 어두웠다. 타자 윤리를 주장한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도 이 무렵 인물이다. 세계대전과 나치 전체주의를 몸소 겪은 그가 프랑스 군인으로 세계대전에 참전해 포로 생활동안 가족이 몰살당하는 비극을 경험한다. 나치 전체주의는 그에게 서구 사상에 문제의식을 가지게 한 계기가 되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동일성(전체성)의 논리다.


인간은 누구나 주관적이다. 내게 친절하면 착한 사람이고, 못되게 굴면 나쁜 사람이 된다. 자신을 중심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재단하면 영영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기에 하이데거가 존재의 관점에서 존재론을 사유코자 했다. 문제는 나의 주관을 타자에게 강요하는 자세다. 서구 근대 이성은 계량과 수치, 계산, 분류화로 세계를 이해하고자 모든 것을 계산 가능하고 조작 가능하게 만들었다.


레비나스는 관점을 달리했다. 세상을 다 이해할 수 없는 무한의 세계로 본 것이다. 존재의 근원을 파악하려던 하이데거의 존재론조차 한계였다. 계산적 이성을 비판하기 위해 등장한 하이데거와 니체 철학도 전체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동일성의 논리 때문이다.


동일성의 논리는 동일성의 확장과 지배라는 특성을 가진다. 전체주의는 인류를 분류하고 통일하기 위해 인간을 전체성이란 논리로 끼워 맞춘다. 레비나스가 동일자의 철학을 비판하기 위해 내세운 존재가 바로 ‘타자’다. 전체주의는 타자를 전체성 안에서 동일자로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라면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무한이었다.


해체로 유명한 데리다, 존재론을 주장한 하이데거, 타자의 얼굴을 강조한 레비나스



동일자 논리의 위험성

동일성의 논리는 전체주의 네 글자로 폐해를 설명하기 어렵다. 자기끼리 부대끼게 놔두면 안 되냐고 묻는다. 요즘 세상에 전체주의가 어디 있냐 물을지 모른다. 타자를 배제한 동일자의 세계에선 어떠한 피드백도 불가능하기에 치명적이다. 타자를 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성장도, 이룩도 없다. 무한 긍정으로 가득 찬 동일자의 세계는 점차 고립된다.


얼굴을 붉히고 떨어져 살면 그만인가? 이 땅을 밟은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를 마주한 채 어울러 살아간다. 자아가 존재하듯 타자가 존재하기에 싫어도 마주해야 하고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다. 동일성의 논리는 확장과 지배라는 특징을 가지기에 레비나스가 보기엔 한계였던 것이다. ‘끊임없이 타자를 정복해야 하고 세계를 확장해야 한다’ 이 폭력성이 전체주의 기저에 흐르는 특징이다.


동일성의 논리로 형성된 각자의 세계는 서로가 서로를 장악하고 정복하기 위해 혈안이다. 전체주의 체제가 막을 내린 지금도 그렇다. 최종해결책 같은 행정적 학살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전체주의 기저에 흐르는 폭력성은 여전하다. 나와 너의 보이지 않는 벽은 나를 고립하게 만들었다. 나의 세계를 확장해 자유를 얻으려면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을 모으기 위해서는 나와 동일한 사람들과 하나로 모이면 된다. 고립은 동일자가 모임으로써 해소된 듯 하지만 갈등은 여전하다.


레비나스가 특이한 관점을 제시한다. 그동안 동일자 중심의 주체를 내세웠다면 그에게 중심은 ‘타자’였고 ‘인식’이 아닌 ‘반응’을 먼저 두었다. ‘너는 누구일까’ 생각기도 전에 너는 이미 존재한다. 그에게 타자는 생각하기 전에 먼저 존재하는 자다. ‘그가 누구일까’에 매료된 사유보다 타자의 호소에 응답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에서 존재에 머물렀지만 레비나스는 존재에서 존재자로 향했다.


소녀의 결심, 닿지 않아도 날린 사랑

고립된 자아 세계에 타자를 초정하기란 불가능할까? 데리다에게 환대는 무조건적인 환대다. 하지만 일상에서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대할 순 없다.


그렇다면 의무감에 젖은 환대가 진정한 환대일까. 데리다는 환대에 앞서 용서의 정치와 용서의 윤리로 나누었다. 강남순 교수는 이를 나선형 관계로 표현했다. 윤리는 불가능성의 세계지만 정치는 가능성의 세계다. 가능성의 세계에서 불가능성의 세계로 끊임없이 거리를 좁혀가야 한다.


나선형 관계는 반대로 빠져나오므로 고립된 세계에도 유효하다. 사람을 갈등─침묵─연민─화해의 네 단계를 거치며 성장한다고 가정할 때, 나선형 관계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무한한 존재인 타자와 마주치며 갈등하고 번민한다. 침묵과 연민을 거쳐 화해할 때 비로소 성장한다.




러블리즈 미니 2집 ‘A New Trilogy’ 타이틀 곡 ‘Destiny(나의 지구·2016. 4. 25)’는 짝사랑에 빠진 소녀를 태양-지구-달이란 메타포로 그려냈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운명, 바라보는 소극적 여성상을 표현한 것이다. 사랑을 이차원으로 표현한 뮤비와 가사는 만남이 불가능한 2D와 3D로 그려진다. 우연한 찡그림을 윙크로 착각한 소녀가 사라지지 않을 현실감과 거리감에 소리치고 만다. “그려왔던 모든 게 다 될 것 같은데!” ‘Cameo’도 그렇다. 단역은 주인공과 사랑에 빠질 수 없다. 소녀는 정해진 운명에 낙담하고 말았다.


운명과 낙담에도 소녀는 결심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들리지 않고 닿지 않아도 풍선을 날리기로!


들리진 않아도

닿지는 않아도

내 맘을 이 풍선에 저 풍선에 담아

여기 Pop! 저기 Pop! Pop! Pop! Pop!


내 맘을 곱게 접어서 세우면

이 차원을 넘어

한 칸씩 한 칸씩

네 세상으로


러블리즈, “WoW!”, 정규 2집 R U Ready?, 2017.02.26.


Pop! 터져가는 풍선,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마침내 정규 2집 ‘지금, 우리’에 와서는 그 사랑이 가까워진다. 꿈만 같은 사랑, 손도 잡고 귓속말도 건네자 소녀는 온 세상이 어지러워진다. 가까워진 사랑, 그리고 좋아하단 말에 설레고 만다. 나에게 향한 타자의 사랑은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흥분을 선사한다.


자기만의 세계에서 손을 뻗지 않았다면 소녀의 사랑은 이뤄지지 못할 꿈에 불과하다. 윤리와 정치 사이에서 끊임없이 사유하고 자아 세계에서 보편 사회로 향할 때 불가능성의 세계와 가능성의 세계는 좁혀진다.


진짜 지애는 어디에

뮤비에서 지애는 이곳저곳 가득한 자신의 브로마이드를 향해 물음을 던진다. “쟤 쟤 쟤 쟤 이뻐 쟤 이뻐?” 나선형적 구조에서의 성장은 확정과 정의를 보류해야 한다는 의미다.


ⓒ울림엔터테인먼트

ⓒ울림엔터테인먼트

사진에서 과연 진짜 지애는 누구인가. 레비나스는 인식보다 반응에 먼저 둔다. 여학생 지애, 걸그룹 지애, 여동생 지애, 여성으로서의 유지애……. 우리는 관념 속에서 지애를 정의하고, 정의된 지애를 부른다. 이내 정의된 지애와 다르면 충격을 받는다. 상처를 받는다. 존재하는 지애에게 왜 너는 정의된 지애가 아니냐고 따진다. 그러나 지애는 존재한다.


2014년의 데뷔 초 지애와 긴 공백 후의 지애, 그리고 현재의 지애. 확정되지 않는 다양한 지애를 통해 타자를 느낀다. 소녀가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세계를 넘어 사랑을 고백한 것처럼 지애라는 존재를 통해 타자의 필요성을 느낀다. 따라서 존재는 악을 상쇄한다.


광화문에 모여 서로가 확정된 정의로 싸운다. 그러나 아직 확정된 것은 없다. 확정 된 것은 오로지 서로가 서로를 존재함만으로 혐오하는 행위뿐이다. 정의된 지애가 다르듯 정의된 박근혜도, 확정된 조용기도 인식과 존재가 서로 달랐다.


하지만 이름이 지애(智愛) 아닌가. 나는 알아가는 것을 사랑하며 타자 이해를, 지애를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