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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now]

[어린왕자와 사막여우] 나가는 순간까지도 발목을 붙잡았던 예수님의 이름으로 씌워졌던 미신들

입력 : 2020. 12. 01 | B11

 

 

오래 발 딛던 세계가 토대부터 무너질 조짐을 보이자 이곳 세계의 존재들을 놔두고 떠나야 했다.


오래 발 딛던 이유로 이곳에 남으려고 고집 부릴 순 없었다. 지켜만 볼 수도 없었다. 그걸 보는 순간 나와 이 세계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용기를 가지고 바깥 세계에 한 발자국씩 내딛다보니 네 번째 해를 맞이했다. 여러 행성을 돌면서 만난 저 세계 사람들은 그렇게 되어버린 배경을 물었다. 현학적인 단어를 나열하며 설명했지만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이 세계의 붕괴, 신의 죽음을 설명하기엔 단어와 몇 가지 문장만으로는 부족했다. 다시 한 번 되짚고 생각들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적었다.


아직도 어려운 설명들은 그러려니 넘겨주길 바란다. 여러 가지 떠오르는 관념들이 다 이해하기 어려울 테지만 여전히 관념들이 옳은 건진 나도 모르겠다. 옳다고 믿을 뿐이다.


일단 팩트만 나열해 보겠다.


㉠몇 달 만에 방문한 교회 방송실에서 동료와 함께 교회 일 하던 중 ㉡나타난 담임목사가 “예배 생활이 안 되는데 동료에게 무슨 모범을 보이겠느냐!”고 호통 치며 ㉢“앞으로 예배드릴 거냐 말 거냐”는 도문(導問)에 ㉣당당하게 “예배를……. 안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더냐! (하긴 가르친 것도 없지)” “내 자신이 한심스럽다.” “마우스에서 손 떼고 나가라!”는 담임목사의 세 차례 일갈을 듣자 ㉥베레모도 쓰지 않은 채 교회를 나갔고 ㉦13년이 이어진 교회와의 관계를 청산해 오늘에 이르렀다.


여전히 그 날 저녁을 드라이하게 작성한 문서하나 없어서 이 신문에 적은 기사들을 종합해야 한다. 당시 일기였던 일과속기록조차 며칠 째 기록되어 있질 않아 추측해 정황을 판단해야 한다. 곧장 도착한 집에서 선배에게 연락했다.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일이냐는 물음도 끝나기 전에 “드디어 교회를 나왔습니다!” 선언한 어투엔 ‘비로소 교회와의 악연이 끊어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해방과 자유’ ‘독립된 삶’, 여러 단어로 버무려도 청량하기만 할 뿐, 꽃샘추위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2016년 3월 19일, 이 신문에 이렇게 적었다. “참여교회 문제, 속 시원하다.”

 

 

교회를 나오자 말했다
“교회 문제, 시원타!”
그리고 마주한 미신
세 가지 괴물과 싸우다

 


◇첫번째 미신: 교회를 나오면서까지도 발목 잡았던 교회동일체 신앙
시원한 바람과 함께 역대급 무더위를 경험하고서 다시금 불어오는 싸늘한 느낌에 겨울이 찾아오자 전역을 맞이했다. 가진 거라곤 작대기 네 개 계급장과 200만원. 다시 신학교로 돌아가 졸업하고 완전히 교회에서 독립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는지 고민은 교회를 나오기 전부터 죽 이어져 왔었다. 신학은 내게 무엇인지, 신이라고 믿었던 하나님은 내게 어떤 존재인지, 그렇다면 다시 교회를 다녀야 하는지 같은 의미를 되짚었다.


먹고 사는 문제만큼 중요했던 질문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였다. 미신은 여기서 타고 흐른다. 교회는 이제껏 교회동일체(敎會同一體)를 추구했다(에베 2,14-22).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고 가르쳤지만, 정작 성서를 해석하는 목사가 신앙 영역에서 모든 것을 지휘하던 검찰과 다름없는 조직이다. 그 아래 교인들은 예배 시간에 성경을 해석한 목사의 가르침대로 교회생활에 충성하며 살아가면 된다. ①바깥 성경공부 금지 ②외부인과 신앙상담 금지 ③교회 내 성경공부 부재 ④성경이 아닌 교회 생활 위주의 설교는 성경 중심이 아니라, 말세지말 종말의 때에 신앙을 지키는 모임을 유지하는 것뿐인 사적 모임과 다르지 않았다. 교인들은 교회 생활에 충성하면 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참여교회에 헌신하며 신앙을 지켜내고 유지하면 된다! 따라서 위 네 가지를 할 경우엔 “지옥에 갈 수도 있고” 신앙을 포기하는 일임을 은연중에 드러내었다. 마지막까지 내 발목을 잡은 것도 교회동일체라는 미신이 자리 했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교회를 나온 이유는 순전히 담임목사 간 신앙적 견해 차 때문이지 신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여전히 성서가 내 삶에 영향을 끼치는지, 하나님이 내 삶을 인도하는지, 이제 막 교회를 나온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재탐색이 중요했다. 먹고 사는 문제만큼.


놀랍게도 교회를 나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게 아닐지 걱정했다. 담임목사 설교는 신뢰하지 않더라도 담임목사의 선한 마음을 분명히 믿었고 믿었기에 비판해선 안 된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소위 ‘주의 종님’을 비판하면 저주받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메시지(마태 7,1)를 귀에 딱지 붙게 들어왔으니 말이다. 그런 담임목사 설교를 지적하는 사람이야 말로 하나님의 판단을 받을 거라고 믿어왔다가 그 목사의 잘못된 설교를 비판하면서 조금씩 저주 받을 두려움이 사라졌지만. 정작 교회를 나오려던 시점엔 ‘이러다 완전히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슬며시 고개를 들고 말았다.


담임목사의 악의가 없었던 의도적 도문 덕분에 교회를 나올 수 있을 만큼 교회 안에서 신앙을 논하고 대화할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초등학생부터 학부, 상병에 이르기까지 진지하게 성경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하거든 내 주위를 떠나고 말았다. 신천지 같은 알레고리 성경 해석을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성경의 당시 역사를 생각하고 인물들과 사건을 취합해 문자 너머 하나님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탐구하는 지극히 개혁주의 성서해석을 추구했다. 성경을 말하려고 할 때마다 나의 성경 해석이 싫어서 떠나기도 했고, 졸업과 함께 떠나던 형들과 누나들, 이사를 가거나 교회를 그만 다니던가 떠나야 했던 이들을 십여 년간 지나치며 마지막 종착지에 도착해서 만난 사람은 같은 대학 선배였다. 자유주의 신학 공부한다고 학교에서 손가락질 당하던 선배라 괜히 움츠려들었고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라 생각했건만, 이미 사랑의교회와 명동성당을 탐방하면서 신앙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나누며 작은 연줄을 이어가던 사이였다.


선배는 미신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세월호 사태만 하더라도 하나님의 주권 때문에 벌어진 일인가, 인간의 잘못으로 벌어진 사태인가.” “성경은 왜 읽어야 하는가.” 한 번도 질문해 보지 않았다. 이제껏 하나님은 전 세계, 전 우주에 편재하면서도 모든 것을 다스리는 무소부재 하나님이라 믿었지만 정작 사회 문제에 대입해 생각해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다”고만 했다. 왜 성경을 읽는가, 구원 받기 위해서다. 구원은 무엇인가. 천국에 가는 것? 성경 어디에 천국가기 위해 예수님 믿어야 한다고 쓰여 있던가? 미궁에 빠지기 시작했다. 선배는 “성경을 왜 읽어야 하는지, 성경에 대한 자신의 사고를 바로 정립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교회생활이 안 된다고?
무슨 의미인진 알는지
넘쳐나는 구원 이야기
내게 어떤 의미 주는지

 


◇두 번째 미신: 절대적 영적 생활을 향한 질문과 답변들
교회를 나올 무렵 내가 믿던 하나님은 옥한흠 목사의 설교대로 교회생활 안 된다고 발로 차는 그런 분이 아니었다. 말이 좀 이상했다. ‘교회생활이 안 된다’고? 교회생활이 무엇인가. 그리고 교회생활이 된다는 말은 뭐지? 연세중앙교회 류의 신앙을 견지한 분들은 절대적 영적 생활이란 단어를 들어봤을 것이다. 하루 3시간 이상 기도하고 하루에 성경 몇 장 읽으며 예수의 피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삶 같은. 하지만 성경에는 교회생활이 되지 않는다고 지옥에 간다는 내용이란 없다.


여기서 질문을 더 이어가 보았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리며 죄인이 되었다면(창세 3,16-17), 단 번에 지성소로 들어가 영원한 구원을 이룬(히브 9,12)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이루는 것인가? 하지만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죄를 지으며 살아가지 않는가. 그래서 바울도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던가(로마 7,24). 조용기 목사는 성부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믿어 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고(사도 2,21; 로마 10,13), 윤석전 목사는 예수의 피로 공로로 죄 사함 받아 절대적 영적 생활을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어떤 목사는 오직 은혜만이 된다며, 부족해도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누구의 말이 옳은지 선택하지 않았고 여러 목사들이 내뱉은 말들을 들어보며 성경을 읽어보았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 앞에서도 권력을 집착하던 헤롯 왕,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쌓아둔 가인 성(창세 4,16-17), 갈릴리와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의 수많은 힘없던 무리들(마태 4,23-25), 여전히 예수와 함께하면서도 연약한 제자들(마가 14,50-52), 홑이불도 버려두고 도망가는 어처구니없는 풍경들. 그런 예수를 바라보며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7)고 말하는 베드로의 처량한 뒷모습이 그려지며 칼빈주의 5대 교리의 첫 번째 항목인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에 주목했다.


성경 어디에도 인간이 완전한 구원을 이루어 살아가는 내용이 없었다. 오로지 부족하고 깨어지며 나약한 존재들인 인간이(로마 5,12)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구하고 그 사랑을 미리 이뤄낸 그리스도가 보였다(요한 5,24; 로마 5,19; 에베 2,15-18). 구원은 살아가며 완성해가는 과정 속에 눈앞에 서 있었고, 구원은 아니, 삶은 여정이란 시각을 발견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무슨 의미를 가진 단어인지 이해했다. 진리는 눈앞에 서 있는다. 그 자리에 선 진리를 향해 인간인 내가 뚜벅뚜벅 걸어간다. 지구상에 그 구원에 다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그 진리가 내 앞에 서 있으므로 저 앞의 진리를 바라보며 걸어갈 뿐이다.


인간의 나약함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의할 만한 주제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죄인 됨’ ‘인간 전적타락’은 교리적 표현이라 공감하기 어려울 테지만, ‘모든 사람은 나약하다’는 명제가 모든 사람들에게 들어맞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군 입대 전까지 감정의 허허벌판 속에서 신나게 보았던 드라마 세 개가 이를 증언했다. 유튜브로 접하다가 각 잡고 본 리갈하이(リーガル・ハイ) 시즌2부터 시즌1, 한자와 나오키(半沢直樹)까지 연달아 시청하며 사카이 마사토(堺 雅人) 매력에 주목했다. 하뉴 하루키 역으로 나온 오카다 마사키(岡田 将生)에게 손가락질 하며 악담을 퍼붓던 변호사 코미카도를 보며 신앙적 충격을 받았다. 인간은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이지 않을까하고 생각한 것이다.


교회에서 드로잉 쇼를 관람하며 물감으로 칠해진 십계명 든 모세의 탈 이집트 물감 앞에서 사람들은 멋있다고 손뼉 치며 좋아했지만. 도리어 하나님을 거부하고 금송아지에게 숭배한 사람들의 원성 속에서 분노한 야훼 하나님의 호통이 들렸다. “나는 이 백성을 살펴보았다. 이 얼마나 고집이 센 백성이냐?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노하였다.”(탈출 32,9-10) 힘겹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살아가는 백성들의(탈출 16,13-15) 힘겨운 탈출 이야기가 내 인생, 모두의 인생 같아 눈물을 머금었다. 교회를 나오기 직전까지 ‘죄인 됨의 은혜’는 내 가슴에 새겨진 구호와 같았고 나약한 자들과 함께하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성경을 읽게 만들었다. 1년에 성경 1회독, 2회독 같은 수치(數値)는 중요하지 않았다. 수치(羞恥)심을 모르고 더 강해져야 한다, 더 힘 센 새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설파했던 그 동안 몸담아온 참여교회에 대한 증오심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태워 없애는 불처럼(히브 12,29).

 

 

죄인으로 몰아넣는 교회
해석해주는 담임 목사
교회의 가르침은 많지만
예수의 진리는 없었다네

 


◇세 번째 미신: 참여교회 담임목사가 만들어 놓은 덫
죄인 됨의 은혜는 어디까지나 사회 참여를 배제한 신앙이다. 다시 말해 신앙은 개인적 문제며 집단과는 관계없는, 나쁘게 말하자면 인식론에 기반한 신앙이자 개인 구원에 초점 둔 신앙이란 의미다. 사회참여 강조하며 가난한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신앙인들이 좋아할 그런 신앙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도 이어지는 하느님과 나의 관계라는 연장선 속에서 죄인 됨의 은혜는 필요했다. 초등학생 저학년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해 학부 2학년을 마치고 군 생활까지 매듭 지은 내겐 사회로 나아갈 동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뇌에 가까운 참여교회의 교리는 내 생각과 삶을 지배한 상태였다. 세상과 교회, 세속적인 것과 거룩한 것, 하나님의 방법과 마귀의 방법, 하나님적인 것과 마귀적인 것. 안도 키와(安藤 貴和)를 사형으로 언도해 죽여 버려서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하뉴 하루키처럼 전 세계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어 하나님 왕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망상에 사로 잡혔던 것이다. 잘 살아보자는 경제개발 구호처럼 열심히 공부하며 살아갈 동력은 되었으나,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지,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은 한나 아렌트 표현처럼 전체주의 체제 속에서 스스로 판단으로 행위 할 능력 없는 무능력한 사람으로 살아간 것이다.


군 생활하며 정독한 아렌트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리갈하이보다 타격을 주었다. 선한 목적을 가지고도 거대한 악에 동참할 수 있고, 악에 복속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고 그 악의 체제가 참여교회라는 한국교회 네트워크란 점에서 충격이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고 죄를 회개한다는 명목으로 교회에 공개적으로 죄악을 고백해 스스로 가난한 자를 자임해 용서받은 죄인이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전도 행위하고 새로 들어온 교인들을 죄인으로 만들어가는 구조 앞에서 전체주의 풍경을 이해했다. 사람만 죽이지 않았을 뿐, 나 같은 자라나는 학생에게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고 교회만이 참이라는 명제를 주입하여 행위 할 능력 없는 무능력한 사람으로 만들어간 지난 세월을 향해 ‘11년 체제’라고 이름을 붙였다. 11년의 세월 동안 써놓은 기록물에 그 증거가 적혀 있다.

 

설교 요약/빼곡하게 적어 놓은 나의 설교 요약문은 직설적이고 원색적이다. “복음은 원색적이어야 한다”는 담임목사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 받은 결과였다. 예수의 가르침이고 복음이라고 믿었던 시절의 글이다.


“너도 주께 감사하고 믿어 천국가야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깨끗한 영혼을 만드는 거야. 그 동안 난 육체는 살아 있지 영혼은 죽었던 시간이었어. 그런데 주님을 믿고 방언 은사를 얻고 나서 육체, 영혼이 살아 숨 쉬게 됐지.” (2006년 11월 24일 일기)


“하나님은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히 4:12).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다(시 119:105).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신 예수님(마 4:1~11). 말씀이 우리를 의의 길을 가르쳐 준다(딤후 3:16~17).” (2011년 7월 22일 스케줄러)


“하나님이 단지 우리의 옆집 아저씨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예배는 중요하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믿기 때문에 기적은 일어난다”(2013년 7월 28일 주일2부예배 설교 기록)


사회에서 들리는 교회의 어렴풋이 알아들을 만한 목소리에 주목하다보면 재미있는 주장들과 마주한다. 교회가 진리를 선언하듯, 하나님의 뜻과 길을 안다는 당찬 포부. 죄의 문제를 다 해결할 것만 같은 자부심.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달리, 죄인으로 인간들을 옥죄며 교회 노동과 교회생활에 동참할 것을 강요하는 역설적 주장들. 이 미신을 걷어내기까지 2년에 걸친 괴로움 속에서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고, 답하고 답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괴로움은 기독교 교리라는 멍청한 질문들에서 벗어날 때야 비로소 사라졌다. 이것 또한 역설적 경험.

 

그래서 기독교라는 세계를 벗어나야 했다. 장미꽃를 놔두고 행성을 떠나던 어린왕자처럼. 죽은 신을 두고 교회를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