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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now]

[지금,여기] 여자애 앞에 서서 조용히 생각했다:「시대유감展」①

 

‘나는 낡았구나.’

더는 낡지 않게 바꾸고 싶었지만 뭘,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를 몰랐다. 후배와 지하상가를 방문했다. 차 밀리던 저녁 늦게 도착해 새로 입은 파란 니트 입은 내 모습을 살폈다. 그간 나를 꾸밀 줄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없이 옷가지를 골라주던 후배 얼굴을 떠올렸다. 옷만 바꿔 입는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했다. 그 밤 어수룩한 맵시를 깨달아 낡았다고 생각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음을 알아차렸다.

여자애 앞에서 수줍게만 서 있던 내게 수식어는 뻔했다. 착하다는 말과 성실하다는 말이 더는 기분 좋은 말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 거무튀튀한 무채색의 조선일보와 성경책은 나를 상징하는 색깔이다. 노래도 조악한 10년 전 곡들뿐이니 화사한 파스텔 풍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교회를 나오고 싶다는 생각이 싹튼다. 생각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이 욕망을 낳은 것처럼. 아이러니하게도 오래되고도 새로운 민중가요에서 탈출의 욕망을 느꼈다.

 

 


그땐 몰랐던 민중미술
신문에서 한번쯤 마주쳤던 민중미술 보면서 생각했다. 미술에도 ‘민중(民衆)’자가 들어가나. 민중신학도 민중사학도 있거늘 민중미술은 뭘까.

 

민중미술(Minjung Art·民衆美術)
전두환 집권 시기인 1980년대 권위주의 정권 속 현실 비판이 사라진 상황을 반성하며 미술인이 주도해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방법과 형식을 정하지 않아서 다양한 주제로 시대상을 표현했다. 정치와 자본주의 생활, 노동과 분단, 여성이라는 큰 주제 속에 이전에는 살피지 못했던 영역을 비추어 민중의 삶을 표현했다.

대한민국 80년대는 격동이 시기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광주는 잔인한 오월을 맞이했고 전두환 왕좌는 굳어졌다. 어떤 미술인은 현실을 외면하지 못했다. 사학자 임지현의 말을 빌리자면 “살아남은 자로서의 부끄러움”(역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84) 아니었을까. ‘현실과발언’(1979) ‘임술년’(1982)이 등장한 배경이다. 70년대를 이끌어왔던 모더니즘을 비판하며 기존 미술을 반성했다. 역사와 사회를 주제 삼아 도시와 대중문화 그리고 자본주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표현했다.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 만하던 엘리트 무리는 아니었다. ‘두렁’(1983)과 ‘광주자유미술인협회’(1979)는 ‘민중이 생산하는 미술’로 대중에게 다가갔다. 시민판화학교와 집단창작은 미술이 사회변혁에 일조하기를 바라던 열망의 흔적이다.

 

 

시계 방향으로 홍성담, 「친구」, 1993-4, 목판화, 20.3×27cm, 「농토」, 1984, 목판화, 43×31cm, 「떠도는 가족」, 1983, 목판화, 23.9×24cm.
황재형, 「탄광촌」, 캔버스에 유채, 52×71cm, 1989.
황재형, 「탄광촌 가는 길」, 캔버스에 유채, 59.9×49cm, 1983.

 

 


소집단으로 활약하던 미술인은 80년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전국규모로 마음을 모았다. ‘1985, 한국미술, 20대의 힘’(1985) 전시회 탄압받자 작가와 평론가들이 ‘민족미술협의회’로 응집했다. 그 사이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터진다. 서울의 봄(1980)에서 6월 민주 항쟁(1987)에 이르기까지 전두환의 시간은 끝날 줄 몰랐다. 박종철이 고문을 당하다 숨졌고 이한열은 최루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슬픔이 어둠으로 장악했다. 미술인은 신문사보다 쉬운 언어를 구사했다. 알아듣기 쉬운 말과 다양한 작품으로 권위주의 정권에 항거했다. “나에 앞서 나라 걱정”이라며 인간 전두환을 칭찬해 마지않던 조선일보 따위와는 달랐다.

 

 

송창, 「사기막골 유원지」, 캔버스에 유채, 130×162cm, 1984.

 

조선일보 라이브러리에서 볼 수 있는 1980년 8월 23일 자 기사 인간 전두환. ©조선일보



잘 모르니까 생겨버린 오해
중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이 좋아하던 곡이 생생하다. 수줍은 듯 재생하던 선생님의 미소를 기억한다. 아이돌 노래 다음으로 익숙하지 않은 안치환 멜로디가 나오자 낯선 기색이 보였다. 그분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원이란 사실을 5년이 지나서야 알았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합쳐 전교조 교사 명단 속에 존경하고 사랑하던 분들의 이름을 발견하고 절망했다. 어쩐지 “조선일보는 좀 가진 자의 신문 같다”던 국어 선생님 눈매가 좌파스러웠다. 착한 학생을 좋아해서 챙겨주던 선생님들 눈망울이 의도가 담긴 메시지로 보이기 시작했다. 오해는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욕망이 싹틔웠다. 운동권을 혐오했다. 새누리당을 지지한 이유도 오로지 북한의 자유통일 때문이다.

 

©홍찬미

 

하지만 안치환의 노래는 곧 잘 들었다. 노래는 좋았기 때문이다. KBS 무대에 올라 기타 치며 멋 부리는 안치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노래는 좋았다. 좋아서 ‘내가 만일’도 들었고 저장도 했다. 이 무렵 “저분들과 사상은 다르지만 노래는 좋아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학우들과 민중신학을 비난했다. 어떻게 노동자가 예수로 보일 수 있느냐고 욕을 해댔다. 전태일의 희생은 귀족노조가 살아가는 현대와 무관하다고 믿었다. 지금 생각해도 기막히다. 이 따위 사고방식 서기까지 공부하지 않는 게으름이 똬리를 틀었다. 반드시 악마여야 한다는 믿음이 민중가요와 민중신학을 알아보지도 못하도록 가로 막았다. 그놈의 영적세계라는 체계가 망쳐놓았다. 관계도 학문도 무지로써 파괴하는 놀라운 할렐루야.

학문적 무지도 관계의 무능도 불통의 우상이 스러져서야 서서히 붕괴했다. 그제야 생각했다.

‘나는 낡았구나.’

오랜 시간 믿어온 신념 체계와 세계가 무너졌다.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의 말을 거치는 방법으로 배워서는 안 되었다. 직접 두드리고 만지고 건드리며 배워야 했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오래될 여행을 준비했다. 정윤경 보컬의 목소리가 가슴을 울렸다. ‘이리로 저리로/불안한 미래를 향해 떠나갔고/손에 잡힐 것 같던 그 모든 꿈들도/음, 떠나갔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정의 위해 힘쓰던 열망을 매도하지 못했다. 울면서 광화문 네거리에 마음을 두었다.

 

 

충격적인 깨달음
오래된 생각과 오래된 행동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 속에
노래를 들으며 다짐한 변화


싫어하는 조국
소위 좌파의 이중성 싫어해
조국의 입바른 말도 싫어해
그래도 몰래 듣던 민중가요


민중의 노래
저 분들과 사상은 다르지만
조금씩 더듬어 가며 배운다
사회 바라보는 마음 소중해

 

 

 

보수와 진보의 공존
학부 시절부터 조국을 싫어했다. 언제든 입바른 소리만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달리 생각지 않는다. 검찰개혁이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법무장관 집안에서 터진 입시비리가 황당했다. 정의의 사도로 나서던 언론도 괴상하다. 조국을 지키려는 서초동과 조국을 내치려던 광화문이 요동친다. 검찰총장이 대든다. 법치를 지키겠단다. 언제부터 이 나라가 이렇게도 정의로웠나. 네 해 지나서야 김종인 입에서 사과문이 오르내린다. 아직도 이 나라는 박근혜조차 매듭 짓지 못했다.

아마 소련이 붕괴된 90년대 초중반의 분위기도 그랬을까. 88올림픽 이후 개인주의가 퍼지면서 가족 구성도 대가족에서 4인 핵가족으로, 다양한 가족 형태로 분화되었다. 사회의 관심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옮겨갔다. 시대가 변하면서 전통의 개념도 변해간다. 세상이 정의로운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투쟁할 필요는 없었다. 더는 대학에서 운동권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관심이 사라졌다. 노래도 들려오지 않는다. 개인의 소외가 교과서 단어만 아니란 사실이 피부에 와 닿자 주위가 고요해졌다. 고요해져야 들을 수 없었던 소리가 들려온다.


“세상은 그대론데/주저할 게 무언가/그대 호각을 이제/내가 입에 물고서…….”

 

 

©꽃다지

 

지금도 민중가요를 말할 때마다 “저분들과 사상은 다르지만 노래는 좋아한다”고 말한다. 노래는 좋다면서 은근히 소개해준다. 시대유감 전시회에 발걸음을 옮긴 이유도 노래에 있다. 저마다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듣기 위해서. 노래가 들려올 수밖에 없었던 자로서 찾아가 두드린다. 그 시절 어른들이 살아온 배경이 궁금하다고. 이 날도 조선일보 1면에는 정경심이 실렸다. 둘 다 마음에 안 든다. 하지만 민중가요는 마음에 든다. 하나 둘, 한 점 한 점 눈으로 만져본 작품들도 그러했다. 멀리서 바라본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가까이서 바라보고, 바라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서 눈으로 만져보고. 그러다가 더듬거리며 매무새를 갖추다가 흠뻑 빠지듯이, 시대유감 느끼면서 태어나지도 않았을 그 시대를 들여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