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 하나만. 해달라는 거 다해줄 게.”
누가 봐도 혹 했을 거다. 동그래진 눈동자. 달아오른 얼굴.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빤히 쳐다보는 얼굴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마주칠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이 무척 어색했다. 가슴에서 허벅지, 허벅지에서 벽시계로. 시선 처리가 다급해졌다. 도대체 뭐길래 해달라는 걸 다 해준다는 걸까. 넌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겠지. 그렇지만 난 그 한마디에 밤잠까지 설쳐야 했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도 같고. 어제였다. 내 마음을 들었다 놓은 같은 반 문소혜 말이다.
“재수 없어.”
집에 돌아가려던 저녁 어느 날이었다. 문 꽝 닫고 들어오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내 앞자리 문소혜였다. 째려보는 내 눈빛에 무안했는지 교실을 한번 훑는 것이었다. 나밖에 없다는 걸 확인했는지 넥타이를 단숨에 풀어버렸다. 녀석은 심호흡 한 번 내쉬더니 내 앞에 멈춰 섰다. 그대로 집에 가는 줄 알았는데….
“어느 방향으로 가?”
“담원역.”
“같이 가.”
어쩌다 같이 걷게 된 하굣길. 녀석은 손에 감은 넥타이를 어슷하게 튕기며 걸었다. 얼굴을 힐끗 보았다. 아까와 다른 생글함에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바지사장 씹어대며 묻지도 않은 푸념을 늘여놓기 바빴다. 바지사장은 학보사 주간이자 담임을 의미한다. 담임 때문에 PTSD 올 거 같다고 징징대기나 하고. 쫑알쫑알 대는 게 완전 별로인 애다. 고개만 끄덕이다 의식적으로 “응” 외마디 내뱉었다. 도착한 정류장에서도 녀석의 뒷담은 쉴 새 없었다. 원래 말 많은 줄 알았지만 이렇게나 많은 줄은 몰랐다. 기계적인 대답이 슬슬 짜증으로 옮아가는 걸 느꼈는지 녀석은 화제를 바꾸었다.
“잘 읽었어.”
“뭘.”
“덤덤한 마음으로 잊는 방법.”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녀석은 말없이 버스에 올라탔다. 곧바로 떠났고 머잖아 카톡이 울렸다.
‘니가 쓴 글’
종잡을 수 없는 애. 어디서 내 글을 본 거지.
문제가 생겼다. 그러니까 어제저녁. 집에 가려다 발에 챈 학보를 아무 생각 없이 본 게 화근이었다. 신문에는 떡하니 내 글이 실려 있었다. 아무리 장난이라 해도 이건 도가 지나쳤다. 허락도 없이 내가 쓴 글을 무단으로 학보에 싣다니. 녀석의 짓이라는 생각에 열불이 뻗쳤다. 이번엔 내가 학보사 문을 꽝 닫았다. 편집국장 문소혜 앞에다가 신문을 펼쳐 보였다.
“네가 뭔데 내 글을…. 너 미쳤어?”
“그 애를 좋아하지만… 고백과 함께 관계가 정리되어서는 안 되기에… 그저 덤덤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수.밖.에. 꺄, 멋찌다. 우다원!”
빡돈 나머지 원고지 쟁탈전에 돌입했다. 녀석은 뺏고 빼앗기는 눈물겨운 와중에도 이상한 말들을 지껄였다.
“너 바지한테 당한 거야! … 장원 낼 때 특약 못 봤어?”
“그게 뭔데!”
담임의 과목은 국어다. 정확히 말하면 문학. 어떤 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됐을 정도로 좀 쓴다고 알려졌지만 굳이 찾아서 읽어 본 적은 없다. 담임은 심심하면 수필이나 논설문 숙제를 장원이란 이름으로 내준다. 하고 싶은 사람만 참여하지만 선발되면 어마어마한 상금을 받을 수 있다. 그때 냈던 글이 어떻게 쟤 손에 들린 거지. 원고지는 담임 휴지통에 버려졌을 텐데. 내 짝사랑 이야기가 만천하에 공개되다니 용서 못 해!
녀석은 앉은 자리에서 원고지를 절대 빼앗기지 않으려 꾸겨질 정도로 끌어안았다. 그러다 소파로 도망쳐 엎드렸다. 나는 입술을 깨물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 이곳저곳 간지럽히느라 온몸이 힘에 겨웠다. 위로 올라가 끌어올리려는데 너무 무거워 몇 번이곤 실패했다. 이상해진 분위기를 느꼈다. 뭔가 당한 기분이 든다. 상체를 내려놓았지만 소혜는 끅끅대며 웃기만 했다.
“큭. 난 어때? 내가 더 잘해줄 수 있는데.”
“뭐?”
소혜가 돌아눕자 둘밖에 없는 공간이란 걸 깨달았다. 어색한 공기. 뒤로 나자빠졌다. 그 틈을 타고 아기 다리로 덤벼들어 몇 마디 툭 던졌다.
“다워나. 소원 하나만. 해달라는 거 다해줄 게. 웅?”
노련한 여우가 보였다.
어이없는 농담과
노련한 여우 같이
은근하게 꼬시는
같은 반, 문소혜
학보사로 끌고 와
갑작스레 들이민
‘연애-근로계약서’
반하게 만든 매력
끝내 서명한 이름
네게 빠져들었어
“근무 시간은 평일 하교 후 3시간. 시급에 맞춰준 급여는 매달 5일마다 입금. 토요일, 일요일은 쉬고. 추가 수당도 두둑이 챙겨줄 거고. 편집은 따로 배울 거 없어. 내가 직접 알려줄 게. 만들라는 대로 만들면 돼. 어려울 거 없어.”
녀석이 이제껏 어그로를 끈 이유는 하나였다. 학보사 이른아침매화 편집기자 때문이었다. 편집기자는 신문을 만드는 기자를 말한다. 같이 일해보자는 거였다. 들이민 종이에는 ‘근로계약서’가 쓰여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갑을 관계였다.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학보사를 나오려 했다. 녀석의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야, 우다원. 니가 나한테 이러면 곤란하지. 맨날 선생님 잘 보이게 엎드려 자주잖아. 피곤할 땐 허리 꼿꼿하게 세워서 니 가려주고. 종이도 말이야 얼마나 친절하게 전달해 줘? 그리고 내가 매일 향수 뿌리는 것도 너 때문인 거 알아? 너 나랑 물건 빌려주기 동맹 맺어진 사이라는 건? 내가 너 그 자리에 앉히려고 어? 뒷돈 먹인 것만 한두 푼인 줄 아냐고!”
“내가 자리 뽑기 잘해서 그런 거잖아.”
박차고 나가려 했다. 다급해진 녀석은 출입문을 가로막고 되지도 않는 협박을 이어갔다.
“아 몰라! 너 쉬는 시간 내내 못 자게 방해할 거야. 맨날 교실 문 꽝 닫고 다닐 거야. 귀에 대고 볼펜 똑딱거릴 거야. 너 쳐다보면서 빵 쩝쩝거리면서 먹을 거야. 맨날 방귀 뿡뿡뿡 뀔 거야!”
“낼 보자.”
하지만 녀석의 마지막 카드에 나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
“내일부터! 우리 신문에 연애편지 나간다고 그랬나? 첫 순서가 우다원이던~데.”
“야!”
또다시 원고지 쟁탈전에 돌입했다. 녀석은 금세 소파에 엎드려 있었다. 어깨를 힘껏 들쳐 올렸으나 소용없었다. 끅끅대며 웃는 목소리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빼앗을 틈이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간지럽히기로 공략하는 수밖에. 녀석의 웃음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구겨져 가는 원고지에서 하나씩 손가락을 뗄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실룩 거리는 어깨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렇게 빼앗을 뻔했으나….
“타임! 타임!”
소혜가 숨을 가다듬었다. 그러다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말았다. 뭐, 뭐지. 침을 꿀꺽 삼켰다.
소혜가 빨간 펜으로 종이에다가 무언가 휘갈기기 시작했다. 큰 제목 ‘근로계약서’ 앞에는 ‘연애’라는 단어가 붙어 있었다.
“여, 연애…. 근로계약서?”
“후. 우다원, 나 진심이다?”
같이 일하는 것도 모자라 데이트까지 하는 갑을 관계라니. 추가된 특약에는 딱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연애는 비밀로써 보장할 것.’
나쁠 건 없었다. 웬만한 알바보다 괜찮은 조건 아닌가. 적당히 일하다가 힘들면 언제든 그만두면 되잖아. 일도 어렵지 않다고 했고. 어떻게 할지 고민이 들었다. 한번 해볼까 싶으면서도 문소혜라 못 미더웠다.
“천천히 서명해. 앞으로 우리, 밤까지 있어야 하는 거 알지?”
밤? 우리? 이상하게 묘한 단어. 금세 머리끈을 문 앙증맞은 입을 보았다. 그 입에서 나온 단어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작고 귀여운 펀치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지 플러팅인가. 손가락 스텝이 꼬여 계약서를 떨구고 말았다. 서로 허겁지겁 주우려다 닿은 녀석의 손. 화들짝 놀라는 저 표정. 진심일까. 가면일까. 탈을 쓴 여우라고 하기엔 따뜻했다. 정말 나란 녀석이 괜찮다는 걸까. 뭐가 아쉬워서? 느리게 지나가는 시간. 마주친 시선. 눈웃음 짓고 있는 소…. 아니 녀석의 역광에 속내가 타들어갔다. 빛과 어둠이 확연한 소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 하지만 나를 무너뜨린 건 녀석의 허벅지에서 발견한 작은 점이었다. 녀석이 치마를 걷은 순간, 시선이 오래도록 그곳에 머물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이 모든 순간들이 만들어진 각본 같았다.
머리로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손은 어느새 ‘연애-근로계약서’에 서명하고 있었다.
완전히 홀려버렸다. 소혜는 생글생글 눈웃음 짓고 있었다. 거절하기엔 오늘의 소혜는 너무나 귀여웠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정말 이게 맞는 건지 되묻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집에서도 내내 소혜의 눈웃음이 맴돌았다. 눈을 감았다. 자꾸만 떠올랐다. 귀엽고 앙증맞아 자꾸자꾸 생각나게 만드는 미소. 끌어당길 땐 과감히 끌어오면서 자기 유리한 대로 끌고 와야 다정해지는 얄미운 녀석.
계약서를 다시 읽어보았다. 표준근로계약서와 별다를 게 없었다. 새로운 내용은 토요일 하루 종일 데이트, 비밀 연애. 그게 다다. 근데 중간에 이건 뭐지? 기간에 정함이 없는….
소혜의 섬뜩한 경고가 떠올랐다. 넥타이를 손끝으로 쫙 당기면서 날린 메시지.
“일방적인 계약 해지 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하, 그러니까 정규직, 아니 종신 계약서였다.
우리의 연애는 사람들이 하교하면서 시작됐다. 녀석은 학보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한 사무실은 달라진 게 없었다.
“내 책상은?”
“네 자리 여긴데?”
녀석은 자기 허벅지를 가리켰다. 앉으라는 제스처였다. 식은땀이 났다.
“내, 내가 니 위에 왜 앉아!”
“뭔 소리야. 내 자리가 곧 니 자리야. 옆에서 마저 작업 끝낼 게.”
아…. 뻘쭘해진 채로 앉았다. 의자는 따뜻했다. 녀석은 내 옆에 서서 원고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녀석의 자리에 앉아서 일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책상에 손을 얹었다. 받침대에는 오늘 자 신문이, 모니터에는 프로그램 단축키 메모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바탕화면에서 소혜의 증명사진과 셀카를 발견했다. 자기애가 무척 강한 애구나 싶었다.
녀석은 원고를 내려놓았다. 넥타이를 단단히 매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강의는 한 번의 쉼이 없었다. 매일 저녁 9시까지 열변의 열변을 토했다. 열정적인 강의였다. 저널리즘이란 무엇인가부터 신문의 역사, 종류, 크기…. 요 며칠 배운 거라고는 신문에 대해서뿐이었다. 레이아웃, 디자인, 판형, 판수. 신문사에서 일해본 것처럼 뛰어난 지식에 압도 당했다. 무서운 애다. 정체가 뭘까.
문뜩 궁금한 게 생겼다.
“어차피 신문 아무도 안 보잖아. 넌 왜 신문을 좋아하는데?”
녀석은 말이 없었다. 자리에 일어나 창밖 야경을 한참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밤 열심히 ‘사랑해’라고 써야, 겨우 내일 그 고백이 닿을 테니까.”
의미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감성을 지켜주고 싶었다.
“다워나. 강의 한 시간 일찍 끝났는데 오탈자 잡는 것 좀 도와줘.”
탈고는 퇴근 시간이 되어서도 이어졌다. 괜히 도와준다고 그랬나. 후회가 밀려왔다. 피곤해 보이는 소혜의 안색을 힐끗 쳐다봤다. 시야가 조금은 맑아졌다. 모니터에 집중하는 널 보면서 조용히 침 한 번 꿀꺽 삼켰다. 몰래 너의 냄새를 맡았다. 향수를 모르는 나로선 그 흔한 이름 하나 알아맞히진 못했다. 만일 이름을 붙인다면 비누 향으로 부르고 싶은 너의 체취가 얕은 땀내와 섞여 코를 자극했다. 다가가기 힘든 도도하면서도 이상하게 끌리는 매력. 내 글을 읽는 동안 너의 오른뺨, 입술, 코, 눈매를 훑고 또 훑었다.
“다워나. 이 단어 봐봐. 이거 말고, 음.”
그 말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농땡이 대신 농탕치다. 어때? 농탕치다. 검색해 보자.”
농.탕.치.다 곧 들이닥칠 적나라한 설명에 나보다 당황한 건 아마 처음이었을 거다. 어느새 시선은 치맛단 움켜쥔 네 손등에 닿았고 뇌리에 박히고만 두 단어 음탕과 난잡. 두 단어에 붙잡힌 너의 흔들리는 눈빛. 이상한 분위기에 정신 줄 놓기 일보 직전. 더는 참을 수 없는, 좀 그런 감정에 한동안 말 없는 이 상황이 떨렸다. 아까부터 덩어리진 연한 립밤에 기분이 이상해지고 참다못해 흐트러지더니 결국.
“이걸 원했던 거야?”
이와 중에 넌 웃고 있더라.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울 듯 말 듯. 입술을 깨물다가. 흐리멍덩해지는 너의 시선. 이번엔 네가 잇는 바람에 코로 숨을 쉬어야 했다. 갑자기 어깨 위에 팔을 걸치고 일어나려 하더니 뚝딱 거리는 걸 들키고 말았다. 일어나야 할 타이밍인 줄도 몰랐던 거다.
“야.”
움찔했다.
“이럴 땐 니가 리드하는 거야.”
말이 끝나자마자 한 번, 일어나면서도 한 번. 다음 호 신문을 올려둔 기다란 책상에다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또 한 번. 눈을 감자 마구마구 붙었다 떼어버린. 하루 종일 사탕에 절여선지 나까지 감염된 달콤한 침샘. 어느새 잔디가 되어버린 네 헝클어진 머리카락. 또다시 가벼운 속삭임. 거칠게 내쉬고 또 거칠게 내쉬다가 쉴 타이밍이라는 걸 알기까지 얼마나 주고받았을까.
“농…. 탕치다도 괜찮은 거 같아. 잘했어. 진심.”
옷매무새 가다듬자 틈을 타 물었다.
“엉덩이 뭐 묻었어.”
“야.”
아까부터 ‘야’라고 부르는 차가운 말투에 가슴이 철렁거린다.
“오늘 좋았어.”
이건 뭐지, 싶은 고백. 바보같이 고개만 끄덕였다. 담원역까지 데려다주면서 또 한 번 키스. 침대에 누워서도 입술에 남은 감촉을 만지작거렸다. 마실 때 소혜 냄새가 내쉴 때 속 안에서 퍼져갔다. 이름도 아니고, “야”라니. 무슨 명령도 아니고. 진짜 문소혜, 어이없어 웃음만 난다.
다음날 새벽. “야” 부르는 목소리에 깼다. 모두에게 잘 웃고 친절하지만 뭔가 찜찜한 애다. 속을 모르겠다. 이미 카톡 프로필은 증명사진에서 오른 손바닥 얼굴 반쯤 가린 컷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만 보라는 의미였다. 가만있을 수 없었다. 빈 프로필에서 증명사진으로 해두었다. 뭐라 부를까. 진짜 소혜. 찐소혜. 찐소♡로 바꾸었다가 ♡는 빼버렸다.
‘(사진을 보냈습니다.)’
엥. 아직까지 안 자고 있었나.
‘저걸로 바꿔’
얼타다 찍힌 내 사진이었다. 언제 찍었지. 생각에 잠긴 것 같은 옆태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는 더 가까워지면 그때 붙이기로 했다. 진짜 문소혜, 살찐 문소혜. 중의적인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푸르게 스며든 벽지를 보았다.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어제의 촉감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좀 나쁜 생각이 들었다. 예상만큼 능숙했다. 소혜는 충분히 나를 리드하고 있었다. 솔직히 언제쯤 해볼지 머리에 그려져 있었다. 능글능글한 속내에 고개를 가볍게 휘젓고 말았다. 죄책감이 지켜주고 싶은 마음으로 둔갑했다. 내 여자란 생각에 미안해졌다.
“야.”
미안한 마음은 찐소의 반말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쟨 “야”라고 부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게 만든다.
“뭐.”
“오타 이거 뭐냐.”
최문정이 다가와 속삭였다.
“다원. 도망쳐.”
신문 마감일이 다가왔다. 학보사에 있던 기자들이 하나 둘 퇴근하는 분위기였다. 마지막 남은 사회부 최문정마저 집으로 돌아갔다. 남은 사람은 소혜와 나뿐. 녀석은 내 옆자리에 서서 엉덩이를 쭉 빼고 첨삭된 원고를 다시 읽고 있었다. 말 없는 분위기에 잘 되고 있겠거니 싶었다. 나는 기다리던 중 계속 녀석의 발가락에 신경이 쓰였다. 원고가 잘 읽히면 리듬을 타고 있었고 조금이라도 엉성한 것 같으면 멈춰 있는 것이었다. 나도 눈칫밥을 먹고 있는 걸까. 어느새 녀석의 기분에 따라 끌려다니는 뭐, 그런?
녀석의 한숨이 이어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숨소리였다.
“조판합시다.”
녀석은 갑자기 의욕적으로 변해 있었다. 왼쪽 엄지에서 사무용 골무를 빼고 원고지를 가득 안아다가 힘껏 내 옆에다가 옮겨 놨다. 녀석은 쌓아놓은 원고 하나를 짚어다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우다원. 다 끝낼 때까지 집에 못 가.”
녀석은 웃고 있었다. 설마 진짜로 집에 못 가겠거니 싶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집에 가면 되겠지.
“자, 3면!”
소혜는 기사를 뭉텅이 째 훑은 후 옆에다 두었다. 빨간 펜을 들더니 사각형 상자를 빈 종이에다가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소혜가 그려준 대로 신문의 레이아웃을 짰다. 제목과 본문, 사진이 조화롭게 배치될 때까지 몇 번의 수정을 거듭해야 했다.
상단에다가 기획실 처장이 교장을 대신해 위탁 업체와 급식실 공사에 협의했다는 내용을 배치했다. 오른쪽에다가는 최문정이 쓴 성소수자 인권 문제를 다룬 기획 기사를 세로로 길게 빼놨다. 급식실 기사 아래에는 짧은 기사를 두었다. 제목과 부제목은 모두 ‘제목제목제목’이라 써놓았고 본문만 복붙해서 채워 넣었다.
소혜가 내 뒤에 서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라”고 일러주자 대충 모양새는 잡을 수 있었다. 그러다 내 머리 위에 슬쩍 기대는 것이었다.
“뭐야. 무겁게.”
“왜. 우리 사귀는 사이잖아.”
소혜는 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제목을 불러줬다.
“새 단장 앞둔 우리들의 러빙 키친. 러빙 키친에다가 작은따옴표. ‘들’자는 뺄까?. 어차피 ‘우리’가 들어가 있으니까. 아니다. 그냥 둬라.”
새 단장 앞둔 우리들의 ‘러빙 키친.’ 급식실이란 단어를 두고 굳이 러빙 키친을 써야 했을까.
“급식실은 단어가 좀 구려. 키친 괜찮잖아. 그냥 키친이라고 하면 좀 썰렁하니까 러빙(Loving)을 넣은 거고. 리빙(Lliving) 하고도 비슷한 단어라 입에 착 달라붙지 않냐. 부제는….”
소혜는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부제목을 뽑아냈다.
“18일 더원케이 업무협약 엔터, 식탁과 조리용품 탈바꿈 엔터, 방학 동안 공사 눈앞으로. 이렇게.”
딱 글자 수에 맞춰 세 줄짜리 문장들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잘했어. 다원아, 제목에 들어간 단어는 절대로 부제에 중복해서 들어가면 안 돼. 제목에 키친이 들어갔잖아. 그럼 부제목에도 키친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조판을 하면 할수록 소혜의 칭찬도 늘어갔다. 가끔 그 칭찬이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졌지만 조금씩 자신감이 붙는 것 같았다.
“야.”
가끔 오타 냈을 때 차갑게 날 부르는 것만 아니면 말이다.
마감을 앞둔 우리의 편집은 밤 10시가 넘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밤새 게임할 때와는 달랐다. 눈이 조금씩 감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신문은 전면광고를 제외하면 만들어야 할 면은 총 7면이다. 어떤 면은 30분도 안 되어 끝내버렸지만 어떤 면은 한 시간 이상 붙잡고 있어야 했다. 특히 마지막 1면.
“쓰레기!”
문 쪽으로 날아간 구겨진 종이에 잠이 깼다. 아까까지만 해도 소혜가 웃으며 해당 기자에게 “잘 썼어”라고 평가해 줬던 그 원고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소혜야. 아깐 괜찮다며. 뭐가 문젠데.”
소혜는 머리를 감싸 쥐고 아무 말이 없었다. 괜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옆에 다가가 원고를 살펴봤다. 중간에 글이 잘려 있었다.
“이거 뭐야?”
“뭐긴 뭐야. 쓰레기지. 어후. 글 제대로 쓰라니까. 다원. 이거 기사 들어간 면 다 지워. 아니다. 다원아, 잠시 나와 봐.”
한 시간 공들인 지면이 날아가게 생겼다. 그저 허탈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짜증이 솟구쳤다. 잠시 무력감에 빠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소혜가 컴퓨터에 앉아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강연 주제와 장소, 사람들의 반응, 하나의 문장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소혜는 문장의 순서를 바꿔가며 조합해 갔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소혜가 써 내려가는 기사에서 오탈자를 잡아냈다. 자리를 바꾸어 앉았다. 손이 가는 대로 빠르게 조판에 들어갔다. 기사 분량이 모자랐다. 사진을 키워서라도 맞춰 넣었다.
소혜도 기사 양을 채우기 위해 몇 번이나 단어를 뜯어고치느라 애를 먹었다. 글자 수를 맞추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이 맴돌았다. 마감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빈 공간 하나 없이 지면을 꽉 채워야 했다. 식은땀이 흐르는 순간이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소혜와 호흡을 맞춰가며 지면 마감에 열을 올렸다.
“오케이. 마감.”
우리의 최종 마감 시간은 자정. 자정을 조금 넘겨서야 인쇄소에 파일을 내보낼 수 있었다. 이제 다음 날 아침 종이신문으로 찾아올 것이다.
“다워나. 고생 많이 했어.”
소혜는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눈웃음 짓고 있었다. 내 손을 만지작거리며 잡아당겼다. 안아 달라는 뜻인 것 같았다. 잠시 멈칫했지만 어느새 자연스럽게 소혜의 손을 잡고 있었다. 나도 수고했다고 격려했다. 생각보다 할만했다. 저녁부터 밤까지 일해야 해서 그렇지. 진짜 연애하는 사이가 아니었다면 견딜 수 있었을까. 그래도 해냈다는 만족감에 뿌듯했다.
소혜는 바빴다. 나랑 같이 있으면서도 바쁘다는 게 문제였다. 언제나 일 생각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 리뷰를 어떻게 쓸지, 맛있는 걸 먹으면 맛집 기사를 어떻게 쓸지부터 구상하고 있었다. 이러다 우리 연애마저도 기사로 쓰는 건 아닌지 걱정될 지경이었다. 물론 소혜가 데이트 코스를 짜면서부터 헤어지는 순간까지 뚝딱뚝딱 해치웠다. 그건 좋았다. 다만 계약에 충실한 관계 같았다. 그게 내가 아니었어도 말이다.
가끔 소혜는 나를 헷갈리게 굴었다. 어느 날은 멀리 외식하러 나갔다. 근무 시간을 넘겨서 넉넉하게 저녁을 먹고 온 것이다. 어젠 왜 이렇게 늦게 먹고 왔냐고 타박이나 했으면서. 돌아오는 버스에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쩔 땐 일한다고 철벽 치는 것 같고, 어쩔 땐 풀어준단 말이지. 가끔은 내가 후순위인 것도 같고, 그러다가도 내가 우선 일 때도 있고. 정말 모르겠다. 문소혜 너란 여자를.
어느새 내 어깨에 기대 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머릿결에서 샴푸 향과 약간의 시큰한 땀내가 풍겼다. 그 냄새에 말려들었다.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냄새.
소혜는 일할 때만큼은 진지했다. 입맞춤을 한 다음 날 은근히 기대를 품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쭈욱. 그새 마음이 짜게 식어버렸다. 평소보다 늦게 남았는데도 말이다! 더 이상의 스킨십은 없었다. 오히려 나는 쉬는 시간 모두 신문 공부에 쏟아부어야 했다. 기사부터 칼럼에 리뷰까지 안 다뤄 본 장르가 없었다. 나는 신문에게 잠식되는 것만 같았다. 소혜에게 일은 정말 중요했다. 때론 나보다 더 중요했다. 조금 서운해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관계는 소혜가 원할 때만 무르익는 것 같았다. 바라고 사귄 건 아니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하잖아. 사귀는 티 하나 내지 않아선지 서운함이 울분으로 차오를 무렵. 나긋한 목소리에 녹아버린 건 나였다.
“다워나.”
쟨 내가 필요할 때만 이름으로 부르더라.
“왜 말 안 해?”
“뭘.”
“지금 네 머릿속에 있는 거.”
들켰다.
“미안. 내가 바빠서. 진짜 바쁘면 연애곤 뭐곤 없어. 진짜 미안.”
녀석은 빨간 펜을 옆에다 두고 빤히 쳐다보았다. 귀여운 눈웃음에 화가 누그러질 뻔했으나 일부러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애교로 풀어주려 해도 화난 얼굴을 유지했다. 그러나 말 한마디, 어깨에 닿은 가슴. 그래서 풀어진 입술.
“이따 라면 먹고 가든지.”
소혜의 고백이 온몸을 묶어버렸다. 움직일 수 없는 매력. 또 빠져든다.
하지만 도파민 같은 소혜의 매력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사건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시간에 벌어졌다. 마감을 앞둔 밤이었다. 그날은 유달리 녀석이 예민하게 굴었다. 1㎜가 어쨌고 저쨌고, 오자 하나에 신경질까지 냈다. 녀석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이 심했다. 고작 실수 몇 번 한 거 가지고 “그런 것도 모르냐” “눈은 뜨고 다니냐”라니.
나를 더욱 열받게 하는 건 녀석의 사소한 행동이었다. 기껏 인쇄해서 보여줬더니 그 자리에서 종이를 구겨 버리는 것이다. 그냥 옆에다 던져 놓으면 또 몰라. 내 자존심까지 짓뭉개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만들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신경질이 났다. 녀석은 점점 말이 짧아졌다. 명령에 가까웠다. 빨간 펜으로 그어가는 횟수가 늘어갔다. 눈알을 치켜들고 녀석을 노려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원고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 마디 하려다 참았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무언가에 끝내 정신줄을 놔버렸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렸다. 녀석은 붙잡지 않았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그대로 집으로 가버렸다.
이틀 감기 몸살을 앓았다. 하루 정도는 온몸이 뜨거워 고생 좀 했다. 학교에 가지 않아서 마음은 편했다. 자고 깨고를 반복했다. 몇 번의 꿈을 꾸었는지 모르겠다. 그날의 기억이 여러 번 재생되었다. 만일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은 되뇌고 있었다. 그래도 소혜를 놔두고 학보사를 나와 버렸을까. 그래도 소혜와 신문을 만들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에 마음은 어둠으로 짙어졌다.
몸이 아픈 것보다 더 아팠던 건 녀석의 반응이었다. 녀석에게는 한 통의 연락도 오지 않았다. 깰 때마다 확인한 카톡 프로필은 변함이 없었다. 나도 신경 쓰지 않는 척 가만 놔두었다. 그래도 빈 화면만 들여다봤다. 소혜의 증명사진을 닳도록 보았다. 안 보기로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지금쯤 녀석은 뭐 하고 있을까. 그날 마감은 어떻게 했을까. 녀석은 진짜로 바빠서 카톡 볼 시간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우리의 관계가 깨지는 걸까. 제대로 서운해졌다.
방은 어느 때보다 조용했다. 평소라면 게임하느라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로 가득했어야 했다. 움직일 힘이 없었다. 하루 종일 퍼질러 누워만 있느라 허리가 지끈거렸다. 눈꺼풀이 무거워질 무렵, 현관문이 열리고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수기 기사님인가 보다. 엄마는 낯선 사람을 만나는데 뭐가 그리 좋은지 하하 호호 웃고 있었다.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잠시 어둡게 가려졌고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기사님이 좀 이상했다. 정수기는 분명 부엌에 있는데. 내 방문을 왜 여는 거지.
“야, 우다원. 그렇다고 제목에다가 문소혜 뻐큐가 뭐냐.”
심장 떨어질 뻔. 놀라서 벌떡 일어나 보니 방안에 들어온 건 정수기 기사가 아니라 문소혜였다.
“그런다고 집에 가버리냐. 그날 밤새우느라 뒤지는 줄 알았잖아. 그래놓고 카톡 한 번 없고. 그럼 내 마음이 어떻겠냐.”
소혜는 반쯤 꿇고 내 상태를 확인했다. 이마에 손을 대는 순간 고개를 피하고 말았다.
“그래. 내가 말 심하게 한 건 미안해. 근데 어떡해. 내 천성이 그 모양인걸. 그래서 너라면 오래 함께할 줄 알았어.”
소혜는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
“네가 선택해. 그만둘래? 아니면 사람 더 뽑을까?”
그만둔다는 건 우리의 연애도 끝이 난다는 의미 같았다. 그렇다고 사람을 더 뽑으면 우리 둘만의 시간이 줄어들 테고 멀어질지도 모른다.
“종이만 구기지 말아 줘.”
나직이 대답했다. 솔직히 소혜랑 함께하는 시간이 마냥 나쁘진 않았다. 힘들었으면 힘들었지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었다. 녀석도 달라지겠다고 했으니. 믿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당연하지. 고칠 게. 미안해.”
웃음이 났다. 소혜의 이런 저자세는 처음 본다.
“근데 그냥 회사였으면 너 바로 잘렸을걸? 나니까 받아주는 거지.”
“어차피 할 사람 없다며. 새로 들어오면 또 가르치게?”
소혜도 웃었다.
“그니까. 너밖에 없다고. 네가 좋다고.”
이른아침매화 편집기자 파업 사태는 이렇게 일단락됐다. 다시 돌아온 학보사. 소혜의 냄새가 가득했다. 의자에는 따뜻한 열기가, 빨간 펜에는 손 때가 남아 있었다. 받침대에는 그날의 구겨진 종이가 놓여 있었다. 달라진 건 없었다. 우리의 연애는 사람들이 하교하면서 시작됐다. 다시 소혜는 원고를 마감하느라 신경질적이었고, 나는 조판하느라 다급해졌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소혜와 더 가까워졌다는 점 하나였다.
궂은 너의 표정과
구겨진 종이 신문
결국은 못 견디고
말없는 우리 관계
이대로 끝인 걸까
갑자기 찾아온 너
“미안해” 한 마디
녹아버린 내 마음
다시 말려들었어
향긋한 네 매력에
비가 마구 쏟아지는 어느 날 저녁이었다. 마감을 앞두고 우리는 분주했다. 신문사는 바쁘지 않은 날이 없는 것 같았다. 녀석은 적당히 신경질적이었다. 녀석의 손길이 닿자 벌게진 흰 종이. 손 때 묻은 빨간 펜이 부러지고 말았다. 빨간 펜을 가져오려는 사이 녀석에게 전화가 왔다.
“보라야!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야!”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았다. 얼른 편집하느라 정신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녀석의 전화는 한참을 이어졌다. 나긋한 목소리만이 사무실에 맴돌았다. 소혜의 지시가 없어서 더는 신문을 만들 수 없었다. 녀석이 전화를 끊자 입을 열었다.
“다원아, 보라가 여기로 온대. 아마 자고 가야 할 거 같아.”
더는 묻지 않았다. 소혜의 눈빛에서 무슨 상황인지를 가늠했다.
이 늦은 밤 보라가 학보사를 찾았다. 보라는 비에 맞았는지 온몸이 젖어 있었다. 나도 놀랬고, 녀석도 놀랬다. 고개를 떨군 보라를 녀석은 진하게 안아주었다. 그리고 재빨리 핫초코와 담요를 가져다주었다. 보라가 씻고 오는 동안 우리는 마저 신문을 마감했다. 또 한차례의 폭풍우가 지나갔다. 뒤늦게 한숨을 돌렸다. 배고플 보라를 생각해 녀석과 라면을 사가지고 돌아가려던 중이었다.
“언제나 바쁘고 다정한 우리 소혜 씨. 이젠 질투심이 나지 않네요.”
소혜는 이제야 내 마음을 깨달았는지 놀라는 표정이었다.
“바쁘고 다정한 여자 싫어?”
“응, 너무 완벽해서.”
웬일인지 소혜가 삐진 것 같았다. 이번엔 내가 다가갈 차례인가? 나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가로등에 비치도록 미소를 지었다. ‘좀만 다가와’라고 손짓했다. 소혜가 조금씩, 조금씩 다가왔다.
친구라서 할 수 없는, 연인이라 가능한 사랑을 우리는 달빛 아래에서 속삭였다. 이제는 있는 그대로의 소혜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먼저든, 나중이든 언제나 진심인 것만은 사실이니까.
다시 말려들었어.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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