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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마운 이름들] ⑤말없이 도둑놈 놔주며 “됐다, 그만 가 봐라”

 

 

버찌씨도 2센트도 아닌 ‘빈손’에

 

지난 번 초코칩쿠키는 대성공이었다. 허겁지겁 삼키느라 제대로 음미하지는 못했다. 이번에는 천천히 꼭꼭 씹어 먹으리라 다짐했다. 점원이 보지 못한 것 같다. 슬쩍 왼쪽 다리에다 겹쳐다가 홧김에 나와 버렸다. TV에 정신 팔리느라 못 보는 것 같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때는 초등학교 2학년. 오늘도 챙겨오라던 준비물을 빼놓고 갔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존나 아픈 기억만 남은 걸 보면 손바닥 아작 날 만했다. 불과 20년 전 엄한 회초리와 귀싸대기가 일상이던 시절의 얘기다. 그땐 거짓말이 일상이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도둑질도 많이 했다. 친구네 집에서 훔쳐온 장난감만 몇 주먹이나 쥐어야 할 정도였다.

실컷 놀다가 배가 고파졌다. 상가 건물에는 1층에 마트와 맞은편 교회가 전부였고 2층부터 미용실·학원·문방구·부엉이 모양의 호프집이 상주했다. 언덕 중턱에서 한신아파트 수문장처럼 서 있는 상가에는 많은 기억이 서려 있다. 항상 문방구 아저씨는 재미없는 YTN이나 YBS 영동방송을 보고 있었다.

미용실에는 30대로 보이는 디자이너가 할머니들에게 둘러쌓여 머리 다듬고 있었다. 초등학생인 날 믿었기 때문일까. 어느 날은 헤어디자이너가 급히 할 일이 생겼다며 투니버스를 틀어놓고 어딘가로 가버리고 말았다. 서너 시간이었을까. 그새 한두 명 찾아온 손님 빼고는 혼자서 미용실에 죽치고 텔레비전만 보았다. 어머니가 헤어디자이너로 공부하고 처음 바리깡 들었을 때 인연도 기억난다. 구레나룻 3㎝ 올라가다가 나지막이 내 이름 부르며 말한 엄마의 당혹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재현아 미안. 근처 미용실 좀 가봐라.” 오천원이었을까. 만원이었을까. 남은 돈으로 맛있는 거 사먹은 슈퍼마켓이 한신마트였다.

 

 

한신마트 주인아주머니
현실 부정 위해 누군가 향해
비난으로 일관하는 삶·태도
내게 집중한다면 없을 일들

 

 

주인아주머니는 터프했다. 배우 이태란 닮은 아니, 이태란 배우보다 더 남성미가 한껏 드러난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가 아들 이름을 부를 때마다 마켓 한쪽 가건물에서 눈을 비비던 남자애의 기지개 펴던 아침은 일상이었다. 그런 아들 아침 차려주고 태워다가 코란도를 끌고 가는 광경을 보노라면 머리를 뒤로 묶은 이태란 배우 저리 가라였다. 그렇다고 무서운 사람이 아니었다. 쿨하다고 보는 게 더 맞다.

언제부터였을까. 세상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는 법이다. 몸으로 터득한 지금은 사탕 하나라도 버찌씨가 아니라 적정 가격 돈으로 주고받는다. 그날은 하루 종일 도둑질할 생각에 설렜다. 한 번, 두 번 성공한 도둑질, 세 번, 네 번이라고 통하지 않으리란 법도 없었다. 학교에 등교해 수학을 가르치던 담임교사 앞에서도 마음 속으로 실실 웃었다. 오늘은 어떤 맛있는 걸 어떻게 훔칠까 상상하느라 4교시 수업이 다 끝나가는 줄도 모르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가슴이 떨렸고, 성공하고서 꿀맛에 취할 생각에 뇌에서 도파민이 폭발하는 기분이 들었다.

마침내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가방을 메고 등장한 내가 한신마트 한바퀴 돌았다. 내게서 관심이 끊어지기까지 시간을 끌었다. 가방에 하나 둘 과자를 집어넣었다. 그냥 빼빼로도 아니고 밀크빼빼로부터 초코칩쿠키, 홈런볼, 달달하면 닥치는대로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저번처럼 아무 생각 없이 냅다 가게를 나서려던 순간 점원이 나를 불렀다.

“학생, 계산 안하고 어디가?”

그대로 도망갔다면 점원이 아니라 경찰 아저씨를 보았을 것이다. 무서워진 나머지 다시 가게로 돌아와 카운터 앞에 섰다. 가방 좀 보자던 점원이 주인아주머니를 불렀다. 계산도 않고 가방에 넣은 과자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하이고, 이 많은 걸.”

주인아주머니도 혀를 끌끌 차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점잖게 물었다.

“이 많은 걸 훔치려고 했니?”

“…….”

주인아주머니는 경찰처럼 다그치지도 않았고 점원처럼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그저 물어보았다.

“먹고 싶어서 훔친 거니?”

‘죄송합니다’라는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먹고 싶어서요’라고 답했던 걸까.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죄송한 표정을 짓자 주인아주머니가 한 말씀했다.

“다시는 훔치지 말아라. 됐다, 그만 가 봐라.”

주인아주머니는 미래를 볼 줄 알았던 걸까. 이후 도벽은 사라졌다. 뭔가 가지고 싶은 욕망이 들 때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가져야 한다는 믿음이 생겼다. 대가없는 호의를 받거든 언제든 그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믿음이 새겨진 것이다.

주인아주머니는 언제나 정직한 사람이었다. 힘들게 마트를 운영하면서도 아들을 씩씩하게 키워낸 위대한 어머니. 수치심보다 용서라는 방법으로 부끄러움을 일깨워준 어른. 그런 정직한 어른으로 살아야 한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