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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에셀라 시론

[에셀라 시론] 유랑하는 너의 삶에게 보내는 찬사

 

 
 
선교단체 인터콥에서 인턴 간사로 일하다 그만두고 쿠팡에서 알바 뛴다는 녀석의 안부를 들었다. 녀석에겐 미안하지만 ‘저 허영심 언제쯤 끝나려나’ 지켜본 게 전부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녀석의 삶과 꿈은 양립 불가능했다. 몸을 혹사하면서 꿈을 이룬다 한들 딱히 나아지는 것도 없다. 그저 공동체 일원에게 인정받는 것 하나? 하느님에게 열심히 충성했다는 자긍심 정도? 혹여나 선교사가 되어 해외로 나간다 해도 몸 어느 한 기관은 망가지고 말았을 것이다. 좁디좁은 쪽방, 하루 수면 4시간, 월 50만원도 채 되지 않는 급여에 ‘그럴 거면 서울대라도 가지’ 혀만 끌끌 찼다.

이 신문 지면에 인터콥 비판 사설과 기사를 실었던 내가 친구 따라 임이스마엘 선교사 보러 집회에 간 게 레전드였다. 1시간 모임인 줄 알았으나 장정 3시간 예배에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가 이 새끼는 아는 게 뭐가 있나’ 싶은 생각에 화가 치밀었지만 언젠간 집회라도 한 번 가주겠다던 약속을 저버릴 순 없었다. 지부 사람들과 정답게 마주하며 이 녀석 좀 잘 봐달라고 인사도 했건만 네 달도 채 되지 않아 관뒀다는 말에 조금은 허무했다. 녀석도 초반엔 초점을 열정에만 맞춘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배울 게 있으니까, 하나라도 배울 수 있다는 부푼 희망에 몸을 던진 것이다. 매일 매일 깨져가는 자신을 보면서 녀석은 조금씩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름만 부르면 알만한 남자의 운전사로 일하다가 고되게 혼이 났다고 한다. 스케줄을 꿰지 못했다는 호통에 기막히고 어이없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인턴에게 무리한 일을 시키고도 이 험악한 데를 견뎌낼 수 있는지 묻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백지장 같은 얼굴로 나타난 녀석을 데리고 한강을 거닐었고 “나도 회사에 처음 들어와 1년 동안은 편집실장에게 무참히 박살나야 했다”는 되도 않는 위안을 건네기도 했다. 효창동에서 짜장면 한 그릇 먹고 헤어졌다.

그렇다면 내 삶은 내가 계획한대로 이루었느냐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해야 옳다. 언제나 계획은 어그러졌고 거듭 미래를 수립하면 어김없이 새로운 사건과 만남이 어제의 나를 오늘의 나에게로 이끌어주었다. 8년 전 오늘이 그랬다. 내 세계의 전부였던 새능력이란 이름의 교회를 탈퇴한 첫걸음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목사에게 훈련 받고 교인들에겐 인정받으며 대충 구원 받았다는 안도감 속에서 살았다면 속 편했을지 모르겠다. 허나 신앙에는 똑 부러진 정답이란 없다는 말처럼 인생도, 삶도 이렇다 할 종착지란 있을 수 없다는 걸 교회 나올 무렵 깨달았다. 따라서 교회를 나오고도 매순간 선택의 갈림길 앞에서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를 따져 물어야 했다. 때로는 부끄러운 선택에 이불을 뻥 차곤 했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한 번의 선택이 궁지로 몰아세우기도 했다. 그저 모든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며 살아가다보니 오늘의 내가 어떤 모습이든 내 삶을 사랑하게 되었다.
 
 
누군간 삶이 이렇다고
훈수나 둘지는 몰라도
네가 쿠팡에서 일하든
기실 해외로 떠났어도
거센 파고 너의 계절
온몸으로 살아내니
고고한 너의 삶에게
경의를 담아 찬사를
 

내 모든 선택이 옳다는 자만(自慢)이 아니다. 언제나 내 선택을 존중하는 자애(自愛) 덕분이었다. 나 자신을 사랑한다 한들 불안이 해소되는 건 아니었다. 모든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연습을 통해 울렁이는 파고에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걸 견디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완전히 계획 없이 사는 것은 아니다. 삶의 계절을 온몸으로 지각한다고나 할까. 정확히 몇 월 며칠에 패딩과 코트를 벗는 삶이 아니라 적당히 따뜻해졌으니 이에 맞는 옷을 입는 지각 능력 말이다. 생각은 옳다고 판단하지만 온몸이 아니라 말할 때가 있다. 이 부조화를 조화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나를 알아야 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사람들은 인생에 알 수 없는 미지의 시공간을 앞두고 한 마디씩 훈수를 둔다. 대충 이 나이 땐 이렇게 살아야 하고, 어느 정돈 돈은 모아야 하고. 안 그래도 거센 파고가 더욱 매섭게 보이는 것도 다 허영심에 가득 차 헛소리하는 인간들 때문이다. 중위소득별 급여 수준은 칼 같이 따져 물으면서도 내 존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돈이라는 물질이 나를 보호해주는 것 같으면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부조화 속에서 혼란한 감정을 느낀다. 내 삶에 대해 진지한 물음,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은 울렁이는 이 혼란한 감정을 추스르게 만든다.

어느 날 녀석은 자신이 없어선지 푸념 섞인 말을 내뱉었다. “나 방황하고 있는 것 같아.” 열차에선 괴괴한 소리만이 감돌았다. 침묵을 깨고 내가 이렇게 답했다. “방랑처럼 보이는 걸. 유랑이라고도 하는. 이쪽 섬도 가보는 거고 저쪽 섬도 가보는 삶 말야.” 누구처럼 울컥한 마음에 회사를 때려치우고 광주로 내려가던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았지만 하여튼 그리 위안을 건넸다. 허나 녀석이 몸 쓰는 일에 혹사하는 삶을 살아도 동정심 따위는 조금도 들지 않았다. 녀석의 삶에는 어디에서 무얼 하든 언제나 응원하게 만드는 애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자부심은 내보이지 않더라도 자신만이 살아갈 그 삶을 사랑하고 있었다. 자신만이 걸을 수 있는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인생에게 해코지 하나 못한 이유였다.

그러나 나는 정작 내 삶을 돌아보지 못했다. 울컥해서 퇴사를 결정한 것도 업보로 돌아온 것 같았다. 부끄럽고 무서웠다. 1년 전, 퇴사하며 점심을 사준 기자님에게 연락했다. 약속은 지키고 싶었다. “일 년 전, 점심 대접해주시면서 언젠가 저도 이 회사를 그만두면 점심 대접해드리겠다던 약속이 떠올랐습니다.” 그도 여전히 유랑하고 있었다. 1년 만에 만난 그 얼굴에서 근심과 절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여행을 다니며 자신의 계절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에겐 각자의 시간표가 존재한다. 이를 지각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자신뿐이다. 때론 지나치거나 뒤처질지라도 가는 방향, 온몸으로 느낀다면 보이지 않던 길도 서서히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