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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서

왜, 여전히 한나 아렌트인가: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입력 : 2019. 01. 07 | 수정 : 2019. 01. 07 |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리처드 J. 번스타인 지음 |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쪽 | 1만5300원

 

난민·악의 평범성·혁명정신으로 본 한나 아렌트

 

생각해보면 아렌트는 난민이었다.

 

미국에서 시민권을 취득하기 전까지 무려 18년 동안 무국적 신분으로 지냈다. 독일계 유대인으로 태어난 아렌트가 나치 전체주의를 피해 난민이 된 해가 1933년이다. 시온주의자를 돕다 8일간 구속된 아렌트는 프랑스로 망명했고 독일과 전쟁 중인 프랑스 정부가 적국 출신 외국인 수감 명령을 내려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만일 귀르(Gurs) 수용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아렌트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철학자 번스타인은 발터 벤야민과 달리 포르투나 여신이 삶의 결정적 순간에 우호적이었다고 말한다.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아렌트가 번스타인을 만나자고 했다. 번스타인 저서 『실천과 행위』 덕분이었다. 악의 평범성과 인간의 조건으로 파편화 된 그를 다시 조명했다. 왜 아렌트를 읽느냐고.

 

 

 

리처드 J. 번스타인 (Richard J. Bernstein)

1932년 생. 아렌트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1972년 번스타인은 그를 처음 마주한다. 사회과학 방법론, 행위이론, 미국 실용주의 철학, 하버마스 철학 등을 저술했다. 아렌트와 관련한 대표적 저서로는 『한나 아렌트와 유대인 문제』(Hannah Arendt and Jewish Question)와 『폭력』(Violence)이 있다.

 

지금도 해결하지 못한 난민 문제

아렌트는 무국적 상태를 현대사의 가장 새로운 대중 현상으로 지목했다. 아렌트가 겨냥한 난민 문제는 유럽에 한정했지만 전 지구적 문제로 부상해 정상화되지 못했다. 대량 무국적 상태 원인을 ‘국민국가’에서 발견한 아렌트는 문화와 언어를 공통으로 한 국민과 법적 상태를 가리키는 국가를 조심스럽게 분리했다. 우파 정당이 ‘참된 프랑스인’ ‘참된 폴란드인’ ‘참된 미국인’의 법적 권리를 주장하는 동안 국민국가를 해체한 여러 국가들은 ‘탈국민화’를 진행했다.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유대인을 향한 배제의 정치는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유대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사법적 권리를 박탈하는 일이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소수자협약은 오히려 소수자를 보호하지 못한 채 민족적 기원을 가진 사람만 완전한 보호를 보장했다. 단지 소수자라는 새로운 범주를 더하는 일이라고 지적한 이유다.

 

난민 문제는 지금도 유효하다. 아렌트 논의가 현대적 적실성을 지니는 이유다. 여전히 난민은 국가와 국민이 분리 된 채 배제됐고 주권 국민이 나서 국민의 자격과 권리를 논할 뿐, 더 큰 수용소를 만드는 방법 외에 침묵한다. 번스타인에게 주권이 오히려 난민을 배제하는데 오용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아렌트를 난민 증가가 현대 정치 문제의 징후가 되리라고 경고한 최초의 정치사상가로 꼽았다.

 

복수성을 잃은 난민: 권리를 가질 권리

아렌트가 난민 문제에 주목한 원인은 잉여적 존재 때문이다. 난민은 두 가지 상실을 경험하는데 첫째는 고향 상실이다. 자신이 태어나 자라온 환경을 잃어간다는 상황보다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새로운 고향을 발견할 수 없기에 전례 없는 현상이다. 둘째는 정부로부터 모든 보호를 상실한다. 단지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인 건 아니다. ‘권리들을 가질 권리(right to have rights)’를 잃었기 때문이다.

 

권리들을 가질 권리는 권리가 보장될 뿐 아니라 권리가 보호되고 조직적 공동체에 속할 권리다. 공동체에 속할 권리가 왜 중요할까.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활동을 행위로 보았다. 행위는 복수성(複數性)을 전제한다. 타자가 존재할 때 자아는 타자와 다르다고 느낀다. 난민이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대변하고 타자와 다른 삶의 양식을 논할 때만 자신을 드러낼 권리가 보장된다.

 

아렌트는 프랑스혁명과 미국혁명에서 등장한 권리에 대한 호소에 의문을 품었다. 인권 호소가 추상적이며 인권을 보호하고 보장할 제도를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가와 국민에게 배제당한 난민은 잉여적 존재로 남았고 어느 누구도 이들을 요구하지 않을 때 위험해졌다.

 

전체주의 체제는 제 2차 세계대전과 함께 막을 내렸다. 전체주의 체제가 사라졌다 해서 인류가 극단적 양태를 피한 걸까. 아렌트는 잉여 존재로 취급받던 난민이 어떤 공동체에도 속하지 못할 권리 피탈을 두고 자유의 권리가 박탈당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이 박탈당한 것은 자유의 권리가 아니라 행위 할 권리이며, 원하는 대로 생각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의견을 가질 권리인 것이다.”

 

“권리를 상실한 사람들의 재난은 그들이 생명, 자유와 행복 추구 또는 법 앞에서의 평등과 의견의 자유─주어진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풀기 위해 고안된 공식들인데─를 빼앗겼다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곤경은 그들이 법 앞에서 평등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한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탄압을 받아서가 아니라 아무도 그들을 탄압하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단지 긴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 비로소 그들의 생명권이 위협을 받는다. 그들이 완전히 ‘불필요하게 되고’ 그들을 ‘요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그들의 생명은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치조차 유대인들에게서 먼저 모든 법적 지위(2등급 시민권의 지위)를 빼앗고 그들을 게토나 강제 수용소로 한데 몰아넣어 살아 있는 사람의 세상으로부터 차단하는 단계를 밟으면서 서서히 유대인 말살을 시작했다. 그리고 가스실을 작동시키기 전에 신중하게 그 근거를 조사했고, 만족스럽게도 어떤 국가도 이 사람들의 반환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점은 생존권이 도전받기 전에 완전한 권리 상실의 조건이 이미 갖추어졌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1』, 이진우, 박미애(역), 한길사, 531~532쪽.

 

외면당한 의견, 아렌트의 한계

이스라엘 건국을 고민한 시온주의자들은 1942년 빌트모어 프로그램(Biltmore Program)을 채택했다. 유대인 주권만 인정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민국가를 건설하자는 선언이다. 팔레스타인 전체를 자유롭고 민주적인 유대인 국가를 설립하고 아랍인이나 팔레스타인인은 소수자로, 2등 시민으로서 권리를 인정함으로 구성했다. 아렌트가 시온주의자와 결별한 이유였다. 아렌트는 빌트모어 프로그램이 끝내 유대인과 아랍인을 각각 전투적 민족주의로 조성할 것으로 예견했고 1947년 11월 29일, 유엔총회에서 팔레스타인 분할에 찬성한 후 전쟁이 발발했다.

 

아렌트가 철학에서 벗어나 정치이론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아닐까. 시온주의자와 달리 두 국민국가(유대인─아랍)가 아닌 연방제 국가를 대안으로 내세웠다. 연방제만이 유대인을 고립으로 두지 않으며 다수 아랍인과 지역평의회에 기초를 두게 할 거라는 예상이다. 하지만 방법을 제시했을 때는 너무 늦었다. 아렌트의 말에 귀 기울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렌트를 마냥 추켜세우지 않았다. 1957년 리틀록 사건을 오판한 아렌트가 정치적 문제와 사회적 문제, 사적인 것을 구분해 사회적 편견과 차별적 관행에 정부는 개입할 권리가 없다고 「리틀록에 대한 성찰」을 통해 주장한다. 흑인 부모들이 투쟁한 희생의 이념을 이해하지 못한 오판이었다. 

 

리틀록 사건

(Little Rock Crisis)

1957년 미국 아칸소 주(州) 리틀록 센트럴 고등학교에서 백인 학교에 흑인 학생들이 등교하려던 9명에 관한 사건이다. 법원은 흑인과 백인의 분리 소송에 전미유색인종협회(NAACP) 손을 들자 주지사가 주방위군을 동원해 흑인 학생 등교를 막았다. 아이젠하워는 주방위군을 연방군에 편입, 군을 투입시켜 흑인 학생 아홉 명의 등하교를 보호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묘사한 아이히만도 그렇다. 번스타인도 홀로코스트 연구에 저명한 크리스토퍼 브라우닝(Christopher Browning) 의견에 동의한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자기연출 전략에 속았는데, 그럴 수 있었던 부분적 이유는 그가 흉내 낼만한 수많은 가해자가 존재했었기 때문이다.”(98)

 

엘리자베스 엑포드/백인 폭도의 위험을 무시한 채 등교 중이다. 1957년 9월 4일, 센트럴고등학교에서 첫 등교 중인 이 사진이 전 세계 신문에 실리자 큰 충격을 안겼다.

 

 

고의적 거짓말이 가져온 자기기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이 아렌트를 비판했다. 메리 메카시가 비판가들에게 답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저술한 「진리와 정치」, 「정치에서의 거짓말」에서 고의적 거짓말을 논했다.

 

‘펜타곤 문서’에 등장하는 고의적 거짓말은 이미지 메이킹을 통해 미국의 강대국에 압도하게 만들었다. 고의적 거짓말은 “토벌 작전에 대한 가짜 설명, 공군의 조작된 피해 보고서, 자신이 수행한 일이 자신이 쓴 보고서로 평가된다는 것을 아는 하급자들이 전장에서 작성해 워싱턴으로 보낸 경과보고서”로 정부 부처와 군, 민간에 만연했다.

 

펜타곤 문서

(Penagon Papers)

제 2차 세계대전부터 1968년 5월까지 인도차이나에서 미국의 역할을 기록한 보고서로 로버트 맥나마라 책임 하에 작성해 대니얼 엘스버그가 이 과정에 참여했다. 공식 명칭은 ‘미-베트남 관계: 1945-1967(United States–Vietnam Relations, 1945–1967)’. 엘스버그가 뉴욕타임즈 기자에게 넘기면서 문서는 폭로됐다. 

 

펜타곤 문서에서 문제해결사들과 정책결정자들은 거짓말을 믿었고 자기 자신을 기만했다. 아렌트는 단지 거짓으로 폄훼된 진리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진리 대 허위라는 범주를 구분할 감각이 파괴됨을 지적했다. 기만하는 자가 자신의 거짓말을 믿어버리는 현상 말이다.

 

1971년 6월 13일 자 뉴욕타임즈 1면/ 중앙에 펜타곤 페이퍼를 다뤘다. 최고 기밀서류인 펜타곤 페이퍼가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를 통해 알려지자 베트남 전쟁의 전말이 드러났다.

 

 

미국혁명에서 찾은 무지배의 형식과 공적 자유

물론 아렌트가 정치를 거짓과 폭력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정치는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132). 아렌트에게 ‘공적 공간’은 인간이 모여 토론으로 의견을 주고받는 장소다. 그동안 정치를 공적 자유 획득의 도구로 사용하고자 권력과 폭력을 동일시했다. 이소노미아(isonomia)는 정치적 평등을 가리키는 말로 아렌트가 이해한 정치는 ‘무지배의 형식(a form of no rule)’이다.

 

공적 자유와 해방을 구분한 이유도 동일하다. 그렇다고 전통적 권력 개념을 아렌트가 몰랐던 건 아니다. 권력 개념을 집단에 대한 개인의 지배와 통제로 이해하기보다 수평적 권력 개념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함께 행위 할 때 권력은 창조된다. 이를 미적 판단을 다루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제1부에서 발견했다. “설득은 물리적 폭력을 배제했기 때문에 폴리스 내의 시민의 상호작용을 지배했다.”(145)

 

미국혁명이 그 예다.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공적 자유를 향한 움직임이 미국혁명 과정이었다. 아홉 식민지 인준을 통한 연방헌법 초안은 격렬한 토의 속에서 주와 연방정부 간 권력 균형을 논의했다. 권력을 제한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권력을 창출하는데서 미국혁명이 독특한 업적을 지녔다.

번스타인이 아렌트 저술에서 관통하는 한 가지로 매듭지었다면 그것은 책임이다. 아이히만은 판단을 거부했고 정치적 책임을 외면했다.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해를 정의한 맥락도 같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진보와 보수의 대립은 지나치게 낙관적이거나 지나치게 비관적이다. 진영 논리에 개인을 포섭해 주체적으로 사유할 능력을 앗아간다.

 

아렌트는 ‘행위’하지 못하고 ‘사유’하지 않음에 경고한다. 잃어버린 인간의 탄생성에 기반한 개시성을 아렌트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번스타인은 말한다.

 

“아렌트는 우리가 공동으로 행위 할 능력이 있고, 새로운 것을 시작할 능력이 있으며 자유를 지상의 현실로 만들기 위해 분투할 능력이 있다고 가르쳐주었다.”(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