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 01. 05 | A29
카페 한 복판에 싸움이 벌어졌다. 아담과 하와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따져댔고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았다며 날이 섰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그 구절로 오류를 가릴 순 없다고 받아쳤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지 믿음의 눈이 아닌 세상의 관점에서 읽으면 안 된다고 했다. 신천지도 성경으로 성경을 푸는데 걔들 논리하고 뭐가 다르냐고 반박했다. “걔들은 이단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는 거니까!”
오늘 처음 방문한 빽다방을 다시는 방문하지 못할 것 같다.
학부시절 4년을 함께한 대풍이가 물었다. “어쩌다 니 신앙이 이렇게 됐냐”고. 생각해보면 성경을 읽기 시작한 중학생 때부터 그래왔다. ‘하모니’란 정체불명 단체에서 성경을 묵상할 때도. 성서 본문의 배경과 인물, 사건 중심으로 저자가 무얼 말하려는지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풍이에게 의도는 아니라 해도 적어도 역사적 배경, 인물, 사건을 중심으로 읽어야 하지 않냐고 물었다.
◇오경, 모세가 쓰지 않았을지도
꽤 오랜 시간 오경을 모세가 집필한 책이라 믿었다. 나도, 인류도. 일단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다(여호1,7-8; 1열왕2,3; 2열왕14,6; 23,21; 23,25; 2역대8,13; 34,14; 35,12; 에스3,2; 6,18; 느헤8,1;13,1). 예수님과 신약도 모세저작설을 전제했다(마태8,4; 19,8; 누가2,22; 16,29; 16,31; 요한5,46; 7,19-23; 사도3,22; 로마10,5; 10,19; 1고린9,9; 히브7,14).
필로와 요세푸스도, 탈무드조차 모세 임종 땐 여호수아가 펜을 들었을 거라고 추정했다. 종교개혁 시기에도 오경의 권위에 집중했지, 정작 누가 집필했는지 질문하지 않았다. 교회도 하지 못한 그 질문을 세상이 먼저 꺼냈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는 『리바이어던』에서 모세저작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스피노자(Spinoza)는 1670년 신학-정치론(Tractatus Theologico-Politicus)에서 네 가지를 지적한다. ▶오경이 모세를 3인칭으로 기술한 점. ▶모세의 죽음을 기술 ▶후대의 이름을 사용 ▶야곱과 요셉 이야기의 비일관성. 서로 다른 두 자료로 결합했을 가능성을 언급한다. 홉스처럼 에스라가 오경을 최종적으로 편집했다고 주장했다.
◇문서가설-단편가설-보충가설 등장
프랑스 의사 장 아스트뤽(Astruc)이 용감하게 모세저작설을 ‘지난 세기의 질병’으로 묘사하며 지적한다. ‘문서가설’의 탄생이다. 아스트뤽은 인간 창조와 사라가 이방 왕에게 넘겨진 사건이 두 번이나 반복된 점에서 의문을 가졌다. 복음서처럼 두 개의 긴 자료와 짧은 자료, 총 네 개의 자료로 배열했다고 봤다. 후대에 이 자료를 조합하며 반복과 비일관성을 갖춘 현재 본문에 이르게 됐다는 주장이다.
가톨릭 신학자 게데스(Geddes)가 모세 시대나 그 이전에 유래한 단편들의 편집으로 반박했다. 단편 가설이었다. 따라서 완성 시기를 솔로몬 시대인 기원전 10세기로 추측한다. 파터(Vater)도 게데스처럼 단편 가설을 지지했다. 보충 가설도 등장했다. 잠언 1,1처럼 ‘이것은 ~의 잠언이다’로 시작한 걸로 보아 원래 오경은 짧은 작품이 여러 시대 후대의 저자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닐까하고 상상한 것이다. 오경을 계속해서 개정하며 본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났을 거라고 추정했다.
◇J-E-D-P 전성시대
벨하우젠(Wellhausen)은 성서를 유심히 살피다 네 개의 자료로 분류했다. 주로 신명(神名)에 따라 J자료(Jehovah)와 E자료(Elohim)를. 율법에 관한 일련의 설교를 다룬 D자료(Deuteronomy). 제사장이 관심을 가졌을 만한 문제인 P자료(Pristly).
신명과 문체에 따라 성서를 네 자료로 조각낸 것이다. 드라이버(S. R. Driver)도 그러했다. 제사장이 다뤘다고 추측하는 P자료의 언어는 역사가보다 법률가의 언어라고 말이다. 벨하우젠과 드라이버는 연구를 통해 오경이 후대의 자료임을 주장했다. 벨하우젠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 서언』(Prolegomena to the History of Israel·1878)에서 이스라엘 종교 발전 과정을 다섯 가지 영역으로 관찰해 결론을 내렸다. 초기 이스라엘은 제사에 질서가 없었고 규례도 단순했지만 점차 관료제와 법이 세밀하게 발전하며 엄격한 준수를 요구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따라서 P자료는 후대의 편집된 문헌이라 일관되게 주장했다.
벨하우젠의 문서가설은 개신교회와 일반대학에 널리 받아들여졌다.
무너지는 모세저작설
계몽주의 시대의 새 물음,
“오경 저자가 모세라고?”
물음에서 비평하기 시작
문서가설의 시작
오경의 네 문헌, JEDP 분석
아스트뤽, 반복과 비일관성
벨하우젠, 신명과 문체 비교
합의가 힘든 이유
성서 원본이 없을 뿐 아니라
문체로 완벽하게 구분 못해
완벽한 문서로 보기엔 무리
그럼에도 여전히 창세기의 족장 시대와 언약 법전에서 초기 이스라엘 초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믿은 학자가 등장했다. 알프레흐트 알트(Albrecht Alt)와 그의 제자 노트(Noth), 폰 라트(Rad)였다. 알트는 자신의 논문 ‘The God of the Fathers’(1929)에서 창세기의 반 유목적인 족장 종교를 통해 그들이 살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을 제시했다. 사례법(case low: 만약 ~하면)과 절대법(apodictic law: 너는 ~하지 말라)을 구분해 이스라엘 법 초기 형태도 가늠했다. 문서가설이 주장한 것만큼 오경이 허구는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제자들은 오경의 초기 형태와 최종 형태 사이의 연속성을 증명하려고 했다.
올브라이트(W. F. Albright)와 스파이저(E. A. Speiser), 고든(C. H. Gordon)은 창세기가 고대 서아시아 자료와 비교하며 비록 오경이 후대에 기록됐지만 역사적 정확성은 확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20세기에 이르러 학자들은 최종 편집된 오경과 실제 발생한 사건들 사이에 연속성을 가진다고 합의했다.
◇조각낸 문서가설 너머 통일의 강조
하지만 문서가설에 치명적 한계가 있다. J와 E자료를 명확히 뗄 수 없다는 점이다. 요셉 이야기 사이에 등장한 창세기 38장은 어색했지만 이제는 뗄 수 없는 한 부분이 되고 말았다. 문서가설은 성경을 조각조각 갈라냈지만 이후 통일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등장했다. JE처럼 자료를 혼합했거나 J자료의 확장으로 볼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이 무렵 학계는 정경비평의 영향을 받았다.
화이브레이(Whybray)는 두 가지 이유로 문서가설을 지적한다. ▶문서가설이야 말로 논리적이지 않고 자기 모순적이다: 문서가설의 전제는 오경 형성 당시 자료도 반복이나 모순을 담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후대 작가들은 최종 편집된 오경처럼 반복과 모순을 용인하는가. ▶반복과 문체 비교보다 더 좋은 설명이 가능하다: 다른 종교적 본문에서도 신의 이름을 다양하게 제시한다. 유독 창세기만 신명의 변화를 자료의 변화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신명의 변화를 문학적 장치로 이해하는 학자도 있다(알터(Alter), 스텐버그(Sternberg)). 문서가설보다 오경의 통일성을 강조한 화이브레이는 단편가설을 인정하며 편집자가 다양한 자료를 활용해 오경을 형성했다고 추정했다.
70년대 미국 학계에서 창세기와 기원전 2000년의 고대 서아시아 본문들이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창세기 이야기가 오랜 시간에 걸쳐 전승됐다고 합의했다. 반 시터즈(Seters)는 이 유사성이 과장됐다고 지적한다. 급진적인 주장을 펼친 반 시터즈는 보충 가설을 이용해 수세기에 걸쳐 기원전 300년 무렵에 오경이 완성됐다고 주장한다. 렌토르프(Rendtorff)도 시터즈처럼 보충 가설로 오랜 기간 자료의 누적 끝에 현재의 오경 형태로 편집될 가능성을 추론한다.
◇합의 없는 오경: 포로기 이전인가 이후인가
그렇다면 오경은 포로기 후기에 편집된 문헌일까? 벨하우젠에 의하면 P자료는 포로기 이후에 등장한 문헌이다. 비평적 유대학자인 카우프만(Kaufmann)은 P자료를 포로기 이전 문헌으로 봤다. 벨하우젠은 농경 풍습에 뿌리 내린 자연스럽고 즉흥적 제사 분위기에서 제사장 주도로 발전한 조직적 체계로 발전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우프만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처럼 고대 동양 문화에는 정해진 시간, 복잡한 규정, 제사장이 주관한 조직화된 제사 체계를 통해 연대를 증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밀그롬(Milgrom)은 에스겔서를 통해 반론을 이어간다. 포로기 이후의 문체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다. 유대 학자들은 느헤미아 시대의 두 번째 성전 의식이 레위기와 민수기 규정과 큰 차이를 발견하며 P자료 역시 포로기 이전 문헌으로 추측한다. 이처럼 고든 웬함(Wenham)은 시터즈 이후 학계가 점차 P자료를 포로기 이후로 볼지, 이전으로 볼지 의견이 양극단에 몰린다고 지적한다.
지금도 구약 학자들은 오경의 기원을 연구하며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성서 원본이 없을 뿐 아니라 신명, 문체에 따라 JEDP로 완벽하게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오경은 모세가 기록한 완벽한 하느님의 문서로 봐서는 곤란하다. 문서가설로 성서를 비평한다 해도 신 존재가 부정되지도 않는다. 성례전(聖禮典) 중심의 가톨릭교회와 달리 ‘오직 성서(sola scriptura)’를 구호로 삼은 개신교회라면 성서무오라는 미신에서 멀어져야 하지 않을까.
구구절절 말해줘도 대풍이는 이렇게 답했다. “평지에서 설교하다가 산에 올라가서도 설교했겠지!(누가6,17)” 아이고, 성경이 잘못했네, 성경이 잘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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