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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서

성경에도 대안은 쓰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구약을 본다: 『구약의 민주주의 풍경』

자유의새노래 2020. 2. 9. 20:02

입력 : 2020. 02. 09 | 수정 : 2020. 02. 09 | 

 

구약의 민주주의 풍경
기민석 지음 | 홍성사 | 192쪽 | 1만2000원

 

막연히 구약성서 시대를 생각하면 ‘고대’라는 단어를 사용해 온갖 언어적 술수로 당시 시대를 깎아내리는 습관을 가진다. 칼빈주의 5대 교리 중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인간 전적 타락’을 되뇌지만 총체적으로 인간의 인식은 진화하지 않으며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취하던 날부터 지금의 인간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죄인일 뿐이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인간 내면의 우월감은 타인을 존중하지 못하게 만들고 정복 대상으로 착각하게 한다. 그게 여성을 향해, 사회적 약자로 향한다.

구약성서 본문을 이용해 야곱과 아브라함은 부자였다는 논리로 성서를 해석하고 모든 이들은 부자가 되어 하느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주장을 설파하기도 한다. 성서를 해석에는 상징적 해석, 원리적 해석도 있다지만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 지금 시대에만 유효하다는 불트만의 비신화화를 엉망으로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피해는 늘 사회적 약자에 향한다. 자기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성서구절을 맥락에서 살펴보지 않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구약성서 시대에도 숙의(熟議)는 존재했다. 고의성이 없는 살인자가 도망하려 한 도피성의 예가 그렇다. 무작정 뒤덮인 감정으로 죽인다고 내게 폭행을 저지른 이에게 두 배로 복수한다고 그 복수가 온전한 복수일 수는 없다. 구약성서의 시대에도 지금의 시대에도 변함없이 숙의는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숙의는 개인적 차원에서 뿐 아니라 공동체라는 아름다운 집단을 통해 완성한다. 고대 이스라엘 시대 정치 이야기다. 저자는 여러 차례 현대 사회 정치 집단은 사법기관과 다르다고 밝히지만 충분히 고대라는 시간에서 생각했을 때 이스라엘의 제도는 고대라고 폄하해서는 곤란하다. 장로라는 어르신에서 회중이라는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무리들이 발생한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함께 도의적 책임을 지려 했다.

◇잊혀진 공동체 인식, 한계를 넘어서
본문에서의 공동체는 도의적 책임을 지는 존재로 묘사됐다. “이 기록들이 반영하는 고대 공동체의 종교, 사회적 윤리는 자명하다. 공동체 일원의 억울한 고통은 공동체 전체의 문제이고 책임인 것이다.”(33) 모두가 개인주의를 선언한 것처럼 사회 문제에는 일절 관심 없는 현상이 벌어진다. 오히려 타인에게 어떠한 피해를 일으키진 말아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개인이란 이름으로 폭행 당하고 있을 땐 내 일 아니라는 생각에 누구도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 오죽하면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2016. 5. 28)를 두고 “비정규직은 혼자 와서 죽었고 정규직은 셋이 와서 포스트잇을 뗀다”고 했겠는가.

따라서 “우리의 미래는 어르신들에게 달려 있다(76)”는 저자의 말은 역설(力說)적이기까지 하다. 모든 것은 전(前) 세대의 책임이기 때문에 “뇌가 썩어 투표권조차 빼앗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달리, 오히려 전 세대를 끌어안고 진부하지만 과거의 교훈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문제에서 대안을 찾고, 원인을 찾은 후 새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적지 않은 영역에서 들려온다. 과연 그런 것일까. 어쩌면 기본이라고 생각해 온 그 주장이, 진부한 교훈이 방법임에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주장으로 외면하려 애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장로나 회중이 가장 이상적 해결 방법이자 대안은 아니다. 야훼 하느님께 왕을 달라고 외쳐댄 이들은 백성들(1사무8,7)이었고, 블레셋과 전투에 패배하자 언약궤를 가지고 한 가운데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은 장로(1사무4,3)였다. 그 때 빼앗긴 언약궤는 다윗 왕 때에 이르러 찾을 수 있었다. 정치와 생각하는 것에 무관심한 이들의 악순환이 이들 시대였고, 그 이름도 유명한 “실로에 행함같이(예레7,14)”가 되는 것이다.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체제나 방법에 회의를 느껴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 노력하지만, 이는 집단의 움직임만으로는 부족하다. 개인의 개별적 숙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느님은 천지를 창조하며 마지막 인간을 만들어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고 논의했을 것이다(창세1,26).

그 숙의의 구체적 방법은 생각하고, 대화하는 일이다. 인간의 실존은 무엇인가 고민하는 것. 흔하디흔한 20대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게 얼마나 중요한가. 함께 군 입대 한 동생에게 이런 물음을 들었다. “모든 게 불안해요. 미래가 왜 이렇게 불확실한 거죠? 이런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걸까요?” 여러 말로 위로도 필요 없었다. 그게 당연한 거다. 어느 20대가 고민이 없을까. 고민을 해소하기 위해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이 적절한 것인지 논의하는 과정이 대화다. 그래서 20세기 정치이론가인 한나 아렌트는 대화를 정치의 기초로 보았다. 저자는 대화와 숙의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법이 곧 정의는 아니다”(99)라고 주장한다. 

 

누군가의 한 숨이 들려오던 다리 아래서.

 

 

구약의 민주주의 풍경

현대보다 고대는 덜 발전?

편견과 달리 존재한 숙의

이스라엘의 고대를 다루다

 

장로 중심의 공동체

공동체, 도의적인 책임을

지탄받는 어르신을 향해

“미래, 어르신에게 달려”

 

숙의 넘어 정초함에는

다수결 한계 위해 숙의와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을

판단의 주체는 자신에게

 


◇어르신이 필요해!
대화의 상대는 부모여야 하지만, 우리 주변엔 의외로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은 사람이 많다. 어렸을 때부터 대화법을 알지 못한 채 누군가를 정복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을 가진 이들도 꽤 많다. 어렸을 때 잡아줄 수 있는 이들은 유일하게 어르신이지만, 누구도 잡아주지 못하는 풍경을 보게 된다. 꼰대와 386이 속된 말이 된 지금의 시간에 동해복수(同害復讐),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유일한 선생으로 묘사한다.

그래선지 저자는 어르신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비슷한 주장의 학자가 한 분 더 계시다. “최근 청소년 범죄가 잔혹해지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교수는 “공통적으로 외톨이다. 과거에는 확대 가족이 있었기 때문에 부모와 관계가 안 좋아도 삼촌, 고모 등 친(親)사회적 규범을 주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은 부모 밖에 없고 대부분 바쁘다. 아이는 인터넷을 통해 편파적으로 정보 검색을 할 수 있다. 범죄를 자습할 능력이 된다. 밤새 잔혹 블로그를 검색해도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며 “이 괴물 같은 아이를 양성하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이냐를 온 사회가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회가 빠르게 성장해 온 단면도 아닐까. 한 종편 프로그램에도 ‘어쩌다 어른’이 있지 않은가. 우리 모두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부여잡고 싶지만, “어─어!”하는 사이에 벌써 어른이 돼 있다. 흘러가는 시간은 붙잡지 못해도, 어른 세대와의 대화로 서로가 서로를 붙잡을 수 있지는 않을까.

◇숙의 넘어 정초(定礎)로
판단과 행동은 현재 이 자리에 선 우리에게 있다. 십계명 아홉 번째 조항에서 네 이웃에 대해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구절은 그 시대를 반영한다.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한 문제는 한 증인으로 정할 것이 아님을 밝힌다. 신명기의 이 같은 조항에서 사형에 이르게 할 증인은, 그에 의해 먼저 돌로 치도록 명한다. 증언이 거짓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다. 하느님이 증언자로 나서기도 했다. 그들에겐 하느님은 모든 만물을 굽어 살피시는 야훼 하느님이다.

변호인과 재판관도 등장한다. 온전한 근․현대의 사법적 제도 절차라고 할 수 없지만, 욥은 자신을 변호하며 하느님과 겨루어 자신의 무죄가 입증되길 바랬고 재판관은 제사장과 함께 등장했다(신명17,8-13). 다수라고 해서 올바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저자는 대천덕 신부의 말을 간접 인용했다. “다수결을 통한 민주주의적 의결 방식이 반드시 성서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다. 지금 인간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의결 방식 중 어쩔 수 없이 최선의 것이기에 이를 적용하고 따른다.”(140)

하느님도 다수결의 폐해를 지적한다.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되며, 다수의 사람들이 정의를 굽게 하는 증언을 할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탈출23,2) 여전히 우리 사회는 주먹이 세고, 목소리가 크면 정의로 생각한다. 논쟁도 그 당시 언변에 의해 이기면 모든 논의는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렌트가 언급한 ‘대화의 정치’처럼 정치는 지속적이어야 하고, 그 자체로 폭력을 배제해야 한다.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 자체가 실존하지 않는 우리 사회에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타인을 조롱하고 저주하기보다,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을 회복해 수단으로 불행한 일이 없어야 한다.

그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이 하느님에게서 온다고 믿는 삶이 신앙인의 자세가 아닐까. 따라서 성서는 다수결이 아닌 제비뽑기를 통해 주로 의결을 처리한다.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의미에서 이뤄지는 제비뽑기가, 금권선거보다 더 정직한 방법이 아닐까.

다시 논의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저자가 말하려는 핵심은 숙의와 정초(定礎) 아닌가. 그래서 마지막 대 단원은 판단력이다. 

이 책의 핵심은 마지막 ‘짧은 이야기: 천상회의 판타지아’다. 다시 한 번 자크 베르제가 등장했다. 사탄의 지적은 원칙적으로 정당했지만, 하느님의 법정적 선언이 인간을 구원할 것임을 예고한다. 제도와 원칙, 법이라는 보수적 가치에 메일 필요가 없다. 직접 법적으로 송사하지 않을 방법은, 용서하면 된다.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악한 일만 벌어지겠느냐. 일상적인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 편재한 지금의 시대에 필요한 건 법적 응징만이 아니다.

본서(本書)를 읽으며 바쁘게 흘러가는 사회와 시간에서 여유를 누렸다. 굳이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독자는 중학교 1학년이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책 한 권을 덮으며, 생각한 단어는 ‘정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