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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에셀라 시론

[에셀라 시론] 2016년 3월 19일, 난파선을 벗어날 때 스친 파수꾼 앞에서 무슨 말을 더할까

입력 : 2021. 03. 19  23:30 | A30

 

ⓒ블록베리크리에이티브

 

난파선 바깥에서 헤매는 사람을 누구든지 유랑하는 자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괴로운 광경을 경험해 본다면 누구든지 유랑이란 단어를 말하지 않는다. 고고하고 유려하게 흘러가는 파도를 생각할 여력 하나 없이 그저 살기 위해 난파되어 흩어진 나뭇조각 보노라면 그 단어가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구조적 문제도 개인적 내부의 문제도 관찰할 시간도 없다. 처량하게 움직이는 몸동작도 비웃지를 못한다. 유동하는 파도 속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하나의 생각만이 들어찬 상황을 겪어본 사람이면 유랑 같은 단어를 떠올리지 않는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느껴지는 복합적 감정도 그렇다. 남자라면 겪어야 했을 구조적 문제들 앞에서, 한낱 힘없이 스러지느라 정신없는 몸뚱이 향하여 손가락질하기 어렵듯. 병장부터 이병 할 것 없이 바보가 되어버릴 군대라는 공간에서 개인의 존재는 무의미하다. 없애지를 못하는 지극히 한국적인 특성에서 발현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불편함은 상처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 총체다. 유랑을 떠나서 개인이니 집단이니, 구조니 하나의 문제로 정의하지 못하고 오로지 서로의 뒤엉킨 감정들 속에서 할 말을 잃은 채 아픔을 더듬을 따름이다. 말없음은 난파선을 빠져나와 살아남은 자들뿐만이 아니라 그 모습을 지켜보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하는 현상인 것이다.

 

운 좋게 파도와 부딪쳐 침몰할 배에서 몸을 버려 거센 파도 헤치며 살아남은 지도 5년이 흘렀다. 모든 것이 찬물밖에 없는 바다에 빠지면 혹여나 죽지는 않을까 내 인생도 여기서 끝나지는 않을까. 수없이 망설이고 망설이던 차 완전히 기울어 무너질 배라는 결론 앞에 혼자라도 살아남기 위해서 투신했다. 파도를 마시며 정신을 잃어서야 도달한 새로운 섬에선 보랏빛 소녀가 서 있었고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기분에 어쩐지 나쁘지 않은낭만적인 이 섬 풍경을 맞이했다. 순전히 운이었다. 그러나 이 섬은 바다가 유랑해서 헤쳐 나갈 공간이고 파도와 해류를 이겨가며 고고하게 항해로 다스릴 만한 존재임을 가르쳐 주었다. 최리를 놔두고서 이제야 입술에 붙은 유랑한 단어를 기억한 채 또 다시 이 섬을 벗어난다.

 

 

죽을 용기를 안고서

난파된 교회 벗어나

살아온 5년의 시간,

조금도 후회치 않는

까닭에 발견한 流浪

당신들 참여교회의

침몰을 바라볼 뿐

 

 

2016319일은 외로움을 견뎌내고, 영원히 유랑할 것 같은 파도에 몸을 투신한 토요일 저녁이다. 베레모도 쓰지 않은 채로 멍청한 공간을 벗어나며 저 멀리 잠잠히 침몰하는 난파선을 탈출한 날이다. 단순 무식한 선장은 상처라는 단어 따위로 상처 갖고 살아서는 안 된다고 지껄이겠지만. 몰아치는 폭풍우 사이에서 내보인 다층적 문제들은 당연히 난파선을 벗어나야만 한다고 결론을 내리게 만든다. 하지만 허지훈의 죽음을 맥없이 목도하고 버스에 몸 실은 그에게 난파선이니 유랑이니 상처라는 단어가 무슨 소용일까. 유랑이기 때문에 일정한 거처가 없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미지의 세계 안에서 심장이 멈출 때까지 헤매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유랑은 모든 사람에게 어울리는 해답이 아니다. 또 다시 해답은 각자의 것이란 어설픈 조언으로 남을 따름이다.

 

운 좋게도 교회선()을 탈출할 무렵 소초(小哨)도 옮겨야 했다. 시대(時代)를 읽지 못하는 죄. 기막힌 죄목을 들고서 어처구니없는 공간을 벗어나기까지 지난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 고작 19개월이 아니다. 한 달을 군번으로 정하고 선후배 가리는 그곳 순리를 깨닫기 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육감적이고 동물적인 감각을 터득해 각자도생 살아남아야 하는 공간에서 고독을 마주했다. 아니다. 고독을 배우라는 말이 아니다. 고독은 군대라는 공간이 아니어도 배울 수 있고, 군대를 나와야만 배울 수 있는 단어도 아니다. 그저 그 때의 상황에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내야 한다는 기억 조작이 슬프게 느껴질 뿐이다. 교회와 소초라는 두 기억 속에서 유랑하는 지금도 그 시절이 아련하게 다가온다.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머잖아 침몰할 난파선으로 돌아간 파수꾼의 심정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붙잡을 지푸라기 없으니 무너질 난파선이라도 붙잡아야 하지 않겠나. 서두에서 말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괴로운 광경을 바라보며 유유자적하게 유랑 따위를 논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운 나쁘게 교회선으로 되돌아갔을 뿐이니까. 그러나 교회라는 방패를 내건 채 악에 복속하면서도 자신이 선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오만함은 용서할 수 없다. 선한 이미지 팔아먹으며 신의 이름을 망령되게 호명하는 자의 말로는 당신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경전 그대로다. 이제 10년을 내다볼 차례다. 결혼에 대한 열망과 제로교육은 고독 속의 산물이다. 우울함의 다섯 괴물을 물리친 것처럼, 대방파제 끝에서 여명의 진리를 바라본 것처럼 새로운 섬을 발견해 나갈 것이다. 그저 모든 게 운 좋았을 뿐이라는 지난한 말들과 다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