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에셀라 시론

[에셀라 시론] 두 번의 실패와 좌절 앞에서

두 차례 실패를 경험하고 두 번의 좌절을 맞이해서야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변화라는 건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 엄청난 용기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았다. 누군가로부터 얻는 선물도, 마음만 먹는다고 주어질 일시적 단호함도 아니다. 그저 순간의 선택으로 보이지만 인생 항로의 몇 도를 틀만한 강력하고 영향력을 가지는 엄청난 용기를 두 번의 좌절을 맞아서도 발휘하지 못했다. 바로 ‘나는 낡았구나’라고 생각한 끝에 스스로가 부끄러워진 이유다. 전통적이고 당연했던 공간에서 벗어나는 순간 경험한 감정인 해방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현실이란 공간에 이르러서야, 해방 너머 풍경을 직시했다. ‘나는 낡았구나’ 좌절 앞에 변화의 필요를 깨달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코로나를 겪으며 사람들이 디지털 담론장에 몰려든다. 왼편에서는 철학자가 눈앞에 서 있는 존재를 가리켰고 오른편엔 세상 돌아가는 작동 방식을 기술자가 묘사한다. 재미있고 흥미로운 강연이 연잇자 댓글에는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을 간증하듯 써 내려간다. 마이크를 들고서 발언권을 얻은 사람처럼 당당하게 인생철학을 설파하는 이를 관찰했다. 헬조선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만의 지식을 습득하셔야 한다고 가르쳤고, 댓글에는 동감하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그런 자신만의 인생철학을 획득하고 하나 둘 실천해가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 둘 지나쳤다. 철학자가 아니어도 살면서 경험한 진리 조각을 덧대어 자신만의 담론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가르치던 핵심은 주체적 삶이었다.

생각보다 힘겨워하는 사람들의 댓글이 많았다. 밤잠을 설치고서 입력한 ‘자는 방법’. 연애하고 싶어서 ‘남자가 여자한테 관심 있을 때’ 우울하고 불안해서 ‘우울할 때 듣는 노래’ 혹시나 경력이 없어도 괜찮을지 싶어서 ‘서른 취업’ 10년 전 ‘베토벤 바이러스’와 10년 후 ‘로스쿨’ 속 김명민. 가슴이 먹먹했다. 전례 없는 상황과 뜻밖의 여정에 헤매는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는다. 게으른 탓이 아니다. 그저 기회를 준비할 뿐이다. 희망을 얻었다는 고백과 위안을 받았다는 꾸며내려야 꾸며낼 수 없는 담담한 문체 속에 오늘도 비경제활동인구 1,686만 명(2020.11.04)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닌다. 꼰대와 불편한 감정의 사건 사고 댓글창을 보지 않은지 오래다. 그러나 교훈과 감동을 주는 동영상 하단에는 즐거운 댓글이 연이었다.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를 모르는 상황임은 여전했다. 즐거운 댓글들 사이에서 즐거운 한 가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코로나 블루가 만든
바깥 세계와의 단절
그 속에서 나와 나의
즐거운 위안 찾는다
“내가 날 사랑하지
않았구나, 미안해”

 


코로나 블루는 변화를 두려워하고 변화하는 세계 속의 이들을 가로 막았다. 보수화가 대표적이다. 보수주의가 나쁜 게 아니다. 마땅히 바뀌어야 함에도 바꾸지 않으려는 반동과 다를 바 없는 보수화가 문제다. 청년 세대에까지 바꾸지 않으려는, 기어이 관성 속에 살려는 분위기가 흩날린다. 따라서 청년의 시간에 소확행 속에서 소소한 즐거움과 오늘의 행복을 찾는 광경이 서글프다. 즐거운 게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교훈과 감동은 때로 살아갈 원동력이 될지언정 해결할 방도 그 자체가 되지는 못한다. ‘나는 낡았구나’ 스스로가 부끄러워진 그 밤저녁을 두 번이나 경험해서야, 두 번째로 찾아온 좌절 앞에 비로소 그 엄청난 용기의 실마리를 찾아내었다.

좌절 속에서 침대에 누워 울기만 하는 아이 앞에 무어라 말해 줄지를 먼저 생각했다. 당연히 “알아. 괜찮아. 나라도 그랬을 거야.” 말했을 것이다. “좀 잘래? 이따가 깨워줄게”라고. 당연하다. 지금은 슬퍼해야 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 아이의 시간표엔 오늘의 좌절이 당연하다기보다, 차근히 진행해야 할 과목들을 미루고, 지우고, 다시 써서 붙인 ‘우는 시간’, ‘좌절 앞에 서는 시간’이기에 ‘울지 마라, 원래 인생은 고단한 거란다’ 따위의 하등 쓸모없는 말 대신 잠시간 잠들고 깨기까지 기다려줄 수 있지 않을까. 그 누워 있는 사람이 나였다면 내가 무어라 말했을까. 당연히 “알아. 괜찮아.”로 시작하는 앞서 나열한 말들 그대로 말해주지 않았을까. 내가 나를 위로하는 광경을 상상만 했을 뿐인데, 나와 내 관계가 돈독해졌음을 느꼈다.

뜻밖에도 나와의 동침(同寢)은 쾌락 너머 자존감을 형성했다. 나를 사랑할 줄 알아야, 타인을 사랑할 줄 안다는 말이 이런 의미일까. 남보다 내가 더 우월해야 발생하는 허상의 자존감과는 결이 다르다. 오로지 나와 나 자신만이 존재하는 단일한 존재 세계 속에서 나 자신 뿐이다. 비교 대상이 없다. 오로지 나뿐이다. 그런 내가 나를 돌보고 사랑해주는 자기 관계 속에서 자폐(自閉)가 아닌 자존(自尊)이 발생한다. 그런 나를 상대로 무엇을 착취할 수 있을까. 그런 나에게 어떻게 경쟁 사회로 떠미는 잔혹한 행동을 저지를 수 있을까. 그리고 또 다시 실패했다. 구질구질했던 그 시절 연애가 생각났다. 나를 아끼고 사랑했더라면, 우는 너의 얼굴을 외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너의 얼굴도 보이지 않으니, 나의 우는 얼굴도 외면하여 좌절 앞에 무너지는구나. 내가 나를 사랑할 줄을 모르니, 너에게 사랑을 빼앗는 제로섬 게임 속 소모적 관계만 보이는구나. 아, 나를 사랑하니 비로소 길이 보여. 엄청난 용기는 아니지만, 소확행 세계에서 벗어날 일말의 희망이 보여. 그래서 사과했다. 그간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구나.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