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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지애문학

[지애문학] 창세기 설화: 분노(憤怒)

 

‘왜 요즘 교회에 안 나와요?’ 이렇게 물어볼 때마다 뜻밖의 대답을 마주한다. 모순. 교회에서 가르치는 가치와 사회에서 생활하며 부딪치는 모순 앞에 쓰러지는 청년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려온다. 돌아오지 않을 당신에게 정직한 답변으로 돌려드리지 못한 부끄러움이 그렇게 만든다. 일요일 저녁이면 업무를 마치고 어깨에 몸을 기댄다. 이제는 누가 들어오든 아랑곳 하지 않는다. 끝 보지 못했던 카톡 심방*을 이어간다. 나른해진 동공에도 엄지손가락 움직임이 끊이질 않자 스마트폰 낚아챈 동료가 묻는다.

*심방(尋訪)  교회의 교직자가 교인에게 연락과 방문을 통하여 안부를 묻고 신앙 상태를 점검하는 일.

“안 쉴 거야?”

아직도 안 끝났는걸. 계속해서 일만한다고 어떻게 잊혀지겠어 나도 모르진 않는데 좀 쉬엄쉬엄 해 걱정 돼.

“죽이고 싶어, 지금도.”

“혼쭐 내줄까?”

“아니. 그래도 날 사랑해?”

공과 사로 분리된 그래서 강박처럼 구분지은 깨끗한 것과 부정한 것 나누던 동료의 입술에서 “사랑해”라는 정직한 대답이 흩어졌다. 부끄러움 모르던 에덴의 동산 신의 낯빛을 피하던 여자와 남자도 교회 외진 곳 한편의 사무실 안 여자와 남자였을 것이다. 사랑해서 용서한다는 말조차 존재하지 않던 두 사람의 세계. 순연한 동산에 찾아와 신처럼 될 수 있다던 꼬임이 인간의 모든 것을 망가뜨렸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모순은 여기에서 싹튼다.

사랑해서 덧붙이는 모든 말들이 그렇다. 사랑하기 때문에 넘어가야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용서해야 한다던 말들. 사랑하는데 전제가 붙는다. 이걸 완수해야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처럼. 하지만 신은 인간이 자기의 위치를 넘보아도 에덴의 동산에서 쫓아냈을 뿐 죽이지는 않았다. 뱀의 말처럼 여자와 남자는 신처럼 되었다. 선과 악을 알게 되는, 모순을 깨달은 것이다. 신도 이렇게 될 줄 알았을 것이다. 욕망에 붙들려 돌로 쳐 자신의 동생을 죽여버린 가인처럼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지금도 상상한다. 실신할 때까지 치고 또 쳐 죽이는 광경을.

거울에 비췬 우리 둘의 모습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애써 감추고 가리던 과거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닌 척 하려고 노력했다. 언제나 부끄러워 숨으려고만 했다. 헤어지자는 목소리가 각인이 되자 퉁퉁 부어버린 채 화장실을 나와 에덴의 동산을 말없이 거닐었다. 지금도 증오로 가득 찬 공기를 마시며 내가 나를 저주하던 해지던 초저녁 복도를 잊지 못한다. 걸음조차 느껴지지 않는 낯선 공간. 멈춰버린 시간처럼 오로지 죽이고 싶다는 욕망만이 들어차 있는. 이미 싹이 트고 뿌리 내리던 모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던 첫 순간. 참을 수 없고 버릴 수 없는 그 증오 그대로 받아들이자 마음먹은 첫 발걸음.

“사랑한다고 말해줘.”

“사랑해.”

알고 있었다. 실컷 탐하다 맛없어진 나무의 열매 대신 새 실과를 탐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애처럼 있는 집 자제도 아니었고 서울대 출신의 성악가도 아니었다. 처음엔 그저 평범한 여자애라 서글펐다. 어차피 떠나갈 운명이라지만 이미 마음에서 떠나간 남자의 어깨에 기대는 이 모순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언젠가 내가 죽이고 싶어 안달이던 그 어미의 그 딸과 주일 저녁을 보내고 있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넌 너무 예뻤다고 말해주는 나른함이 좋았다.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건 사랑하지 않는다는, 떳떳하지 못하다는 증거 아닌가. 그래서 예수도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만 하라고 말한 걸까. 현호를 사랑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누나라고 불러줘도 거리낌 없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