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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서

병신 같은 노동 착취… “한국 사회 문해력을 묻는다”:『임계장 이야기』

임계장 이야기
조정진 지음 | 후마니타스 | 260쪽 | 1만5000원


어쩌면 이 손님과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생각 없이 바코드를 찍어댔다.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완전한 퇴사를 결심했다. 퇴사는 말해둔 상태다. 다음 근무자를 구하기 전까지만 일하기로 돼 있었다. 정확히 일주일. 일주일 만에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다. 이어진 사장의 말은 지금도 뇌리에 박혀 있다.

“그건 네 사정이고!”

반년에 가까운 시간, 편의점에서 보내온 야간 근무는 즐거울 때도 많았지만 힘겨울 때도 많았다. 밤을 새야 하기에 피로가 누적되어 자도자도 피곤함 연속이다. 여름이 끝나가고 가을이 다가왔다. 처음 일 시작할 무렵 입었던 옷을 꺼내 입었다. 맞은편 초등학교엔 가을 운동회 플랜카드가 걸려 있었다. 출근 후 정겹게 웃으며 교대하던 사장에게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초등학생 시절 향수가 밀려옵니다.”

그 향수도 퇴사 앞에 고꾸라졌다. 만취 고객과 진상 고객이 괴롭힌 탓이다. 역류성 식도염에 걸려서야 못해 먹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6만원 벌기 위해 몸을 버릴 필요는 없었다. 생글하게 대하던 그 사장은 없었다. 먹고 사는 일 앞에 니 사장 네 사정 질러대기 바빴다.

한 오피스텔에 마련된 노동자 휴식터에서. 이 곳엔 변변한 칸막이도 없다.



◇‘네 사정’에 담긴 어른들 문법
노조가 좌파 빨갱이로 보이는 서슬이 퍼렇던 시절엔 이런 책이 눈에 뵈지도 않았다. 그러나 모든 젊은이라면 취업전선 앞두고 자연스레 생각이 바뀌기 마련이다. 도서관에 앉아 임계장 조정진 씨가 2016년 6월1일부터 같은 해 8월20일까지 몸담은 버스 회사 이야기를 단숨에 읽었다. 좆같음이 밀려왔다. 이 무렵 군 생활하던 향기까지 더해져 씨발 같은 감정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리고 이 책을 1년 동안 묵혀 놨다.

다시금 ‘임계장 이야기’를 꺼내들었을 땐 이선호 씨가 숨진 후였다. 아버지 이재훈 씨는 한겨레 인터뷰에서 “아버지로서 부끄러워 아들을 다른 곳으로 보낼 수 없다”고 절규했다. “제2, 제3의 이선호가 나와서는 절대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어디서 많이 본 문법(文法)이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근무하던 김용균 씨가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숨지자 어머니 김미숙 씨에게 대통령이 한 말이기도 했다. “제2, 3의 김용균이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이 법(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연내에 반드시 처리돼야 한다.”(2018.12.28)

그럼에도 요원하다. 사측은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한 사람에게 많은 일을 부여한다. 제 몸 갉아 먹어서라도 생을 유지해야 하는 사람에겐 지옥 같은 환경이다. 당연한 거라고 말한다. 이 문법도 익숙하다. 사람이 부족해서 휴가 쓰기도 힘들던 순간마다 “어쩔 수 없다”던 말. “그건 네 사정이고”에 담긴 한국 노동 환경은 군대나 취업전선이나 다르지 않았다.

◇공부 못해서라고 지껄이는 어른들
젊으면 괜찮을지 모른다. 젊어서 일할 곳도 있다. 부모님 찬스도 가능하다. 늙은이는 다르다. 저자는 38년 공기업에서 정규직으로 근무했지만 은퇴 후가 문제라고 가리켰다. 자녀의 학비, 혼수(婚需), 주택담보 대출은 퇴직한 조정진을 일터로 몰아붙였다. 번듯한 직장과는 달랐다. 볼펜을 빌려줘도 돌려받기 힘든 공간. 돌려받을 생각조차 나지 않는 근무 여건. 사무실도 인수인계도 없는 고속버스 터미널. 다쳐도 해고하고 곧바로 새 사람 채우는 회사. 사람을 빨래마냥 쥐어짠다. 최대한 빨아먹을 수 있는 모든 꿀은 쥐어짠다.

“당신도 이제 화려한 시절은 갔으니 그 시절을 빨리 잊어야 합니다.”(20,2) 공부했으면 이런 일터에선 일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공부 않은 이들 대가를 왜 회사가 이득으로 취하나. 얼토당토않은 어른들 문법이 가랑비에 옷 젖듯 후세로 이어진다. “네 사정이고”도 그렇다. 비급여 항목은 산재보험이 모든 항목의 치료비용을 보상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말 그대로 “네 사정”일 뿐이다. 아직은 일하다 다치면 소모품 취급당한다는 이야기가 와 닿지 않을 것이다. 번듯한 직장을 가졌어도 누구라도 늙은이가 된다. “나이 먹어 박스라도 줍고 산다”던 좆같은 문법은 누구로부터 시작되었을까.

늙은이뿐만 아니란 게 문제다. 사회 초년생은 사회생활이란 문법을 주입 당한다. 가스라이팅도 이 시점에 등장한다. 성역 없는 올려치기와 내려치기는 칭찬과 조언이 아니다. 잘한다는 당근을 이용해 못한다는 채찍으로 조련하는 어른들 문법이다. 순진한 청년들이 착취당하는 노동이 ‘사회생활’ 단어 네 글자로 집약된다. 이런 좆같은 어른들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 일을 잘하고 못하고는 스스로가 안다. 내가 무얼 잘하는지 아는 게 사회생활의 시작이다.

2020년10월 KBS 보도.



◇이 시대 문해력
글쓴이 조정진 씨가 강제추행 혐의로 피소됐다.(2020.10.28) 피해자 변호인 오선희 변호사(법무법인 혜명)는 “자신의 유명세와 영향력을 악용해 자신을 존경하는 피해자를 강제추행했다”고 밝혔다. 외부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피해자가 사과를 받아들였다. 피해자는 조 씨가 여전히 외부 활동을 이어가자 고소했다.

피해자는 변호인을 통해 악용을 말했다. 노동인권운동을 멈춰달라고 주장한 것이다. 인터넷 어딘가에선 좌파의 위선이라고 떠든다. 조 씨가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했다고 한들 노동자에게 가혹한 노동 환경이 옳은 건 아니다. 앞으로도 이 사회는 바뀌어야 한다. 만일 조 씨가 글 못 쓰는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책 한 권 낼 수 있었을까. 자신의 언어를 풀어 사람들에게 내 보일 힘이 있었을까. 입주민 폭력에 고의적 자해한 경비원의 유서를 보았다. 삐뚤빼뚤 맞춤법도 맞지 않은 이들을 위한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노동 환경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누군가를 좌파로 몰아내고. 피해자를 의도 가진 이로 몰아가고. 그것도 모자라 사회생활 운운하며 좆같음을 대물림하는 한국 사회 문해력을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