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겨운 영화의 한 장면 [괴물] 앞에서 가수 조용필의 뛰어난 위력을 느꼈다. 영화의 변주를 그저 패러디쯤으로 여겼다.
아날로그 텔레비전을 바라보는 배우 이솜의 장면과 갑자기 등장한 영화 속 낯선 이솜에게서 한 가지 의아한 감정을 느낀다. ‘당신이 저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데.’ 머지않아 이솜의 흔들리는 눈빛에서 알츠하이머라는 불편한 진실을 떠올리고 말았다.
장면의 변주는 [부산행]과 [응답하라 1997]을 떠올리게 했고 마냥 패러디처럼 보이던 파편화된 장면들은 곧 한 여인의 인생임을 깨닫는다. 전 인생을 아날로그 텔레비전으로 다시 보는 병실 속 이솜은 알츠하이머 환자인 것이다.
이름조차 없는 6·25전쟁과 어쩔 수 없는 아들의 군 입대, 여인은 말없이 미소를 가득 안은 채 사랑하는 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기억은 더 멀리 1991년 학예회로 돌아간다. 텔레비전에서 사진을 찍어주던 낯익은 얼굴을 본 여인의 미소는 곧 무표정으로 바뀌고 곧 간호사였음이 드러난다.
여인을 애초롭게 바라보는 배우 박근형의 낯빛은 더욱 장면을 슬프게 만든다.
아날로그 텔레비전에서는 여인의 기억이 끊임없이 재생된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괴물과 한국의 경제 성장 그리고 발전사, 딸의 수능, 아들의 군 입대, 학예회, 점차 기억은 어렸을 소녀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마주한 어머니. 가장 원초적인 고향이 속삭인다. “그래도 돼.”
무릎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강한 힘.
다시 그 힘이 다음의 시간을 살아가는 배우 전미도와 변요한에게 미소가 되어준다.
영화 [괴물]과 [부산행]까지는 그래도 괜찮은 서사였다고 생각한다. 살만한 시대의 살만한 메시지 말이다. 이후 [오징어 게임]과 [기생충], [더 글로리]에 이르러 현대 한국인은 더욱더 미래에 두려움을 느끼는 듯하다. 극단이 만든 자본주의의 숨겨진 웃음과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경쟁, 개인으로 파편화되어 철저히 ‘서울’만 남은 한강의 최후 대한민국.
대한민국은 철저히 노인의 죽음을 묵인하고 있다. 압도적인 노인자살률과 노인 빈곤율은 다음의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더욱 외면을 권고한다. 살아남기 위해 버려야 할 존재라는 것을. 여인 곁에 남은 박근형과 아날로그 텔레비전은 그나마 나은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그마저도 기억할 텔레비전조차 없는 이들은 끊임없는 기억의 변주 속에서 스스로의 세계가 사라져가는 공포를 매일 경험한다.
그동안 우리는 한국의 경제 성장과 발전사를 끝없이 찬사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트라우마를 단 한 번이라도 직면해 본 일이 있는지 묻고 싶다. 지금 여러분의 머리를 스쳐가는 수많은 잔혹한 사건들. 이름조차 없는 6·25전쟁까지도.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일단 1950년도 6·25전쟁을 겪으며 온 국민이 트라우마 환자예요. 그거 한 번도 제대로 치료한 적 없어요. 그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자식을 낳고 굉장히 집에서도 폭력적으로 자식들한테 했고, 사회구조도 그렇게 돌아갔고…. 제주 4·3 그렇게 민간인이 3만명이 학살당했는데, 그 트라우마 한 번도 치료한 적 없어요. 광주항쟁? 한 번도 치료한 적 없어요. 이런 것들이…. 트라우마를 입은 사람들이 온 사회에 굉장히 넓게 퍼져있는데…. 그런 것들이 이렇게 누적이 되다 보면 타인에게 적절한 정도의 공감을 한다든지, 타인의 고통에 감정이입을 한다는 것이 사회구조적으로 굉장히 어려워져요.”(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정혜신)
발전의 정점에 이르러 사람들이 미치고 좀비가 되어도 여인은 웃는다. 피부가 쭈글쭈글해지고 나무 도형을 맞추지 못해도 여인은 웃는다. 여인에게 남자는 슈트 입은 멋진 아들이고 여자는 마법 소녀로 변신한 딸로 보일뿐이다. 그럼에도 여인은 환하게 웃는다. 여인은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기억한다.
가왕 조용필 신보 11년 만
전 국민 눈시울 붉힌 뮤비
외면하고 싶은 진실
애틋한 눈빛의 노쇠한 남자
한국 발전사와 소녀의 시간
그렇게 보이는 이유
천만 영화의 서글픈 변주에
마냥 패러디인 줄 알았는데
그리고 던지는 질문
완벽한 알츠하이머 연기와
‘자신을 믿어 믿어 보라’는
조용필의 간절한 멜로디에
한국의 트라우마를 묻는다
조용필은 이번 앨범을 두고 “이게 마지막일 것”임을 밝혔다. 그에게 마지막 멜로디는 패자에게 향해 있었다. “올봄 TV에서 스포츠 경기를 보는데 카메라가 패자는 전혀 비추지 않고 우승자만 비추더라. 그래서 ‘패자의 마음은 어떨까, 속상하고 섭섭하겠지만 나 같으면 다음엔 이길 거야, 힘을 가질 거야, 지금은 그래도 돼, 한 번 더’하는 생각을 했다.”
달에서 텔레비전을 바라보는 여인은 무엇을 의미할까. 뮤직비디오 연출을 맡은 이주형 감독은 “희망이란 단어가 유치하게 느껴질 정도로 어둠 속을 걷고 있는 이들에게 당신을 응원하는 음성과 시선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밝혔다.
여인은 기억을 안은 채 다음 시간을 살아가는 딸과 아들의 행복을 빌어줄 것이다. 가왕의 마지막 멜로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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