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자유의새노래 칼럼

너의 빈자리를 느끼는 동안

자유의새노래 2024. 11. 13. 19:41

 

아담과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는 동안 성서는 하느님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밝히지 않습니다. 당신은 마치 이 모든 광경을 보지 못한 것 마냥 뒤늦게 동산을 거닐 뿐입니다. 아담도 뒤늦은 신의 발걸음을 들으며 부끄러워합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담과 이브는 벌거벗은 상태임을 깨닫고 숨어 버리고 맙니다.

 

어렸을 땐 혹시나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떠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성인이 된 지금은 불안한 마음이 오래 머물지 않더군요. 좋아하는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정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하느님으로부터 분리 된 인간은 늘 불안한 상태에 노출 돼 있음을 지적합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든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작별할 수도 있습니다. 이별이라는 이름으로 짧은 헤어짐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본질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시간, 조건, 환경은 유한합니다.

 

예수의 제자들도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생각하며 기억을 떠올립니다. 예수와 연결되던 순간을 되짚습니다. 다시 당신이란 존재를 만날 수 있었으면 했습니다. 그 예수가 바로 옆에 서 있음에도 제자들은 알지 못합니다. 함께 엠마오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기억 속에 남은 예수의 존재를 되새길 뿐이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선 아담과 예수와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 모두 신 존재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외로움과 그리움 속에서 그 신의 존재를 되짚습니다.

 

저는 꼭 존재가 사라져야만 빈자리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빈자리를 느낄 때 더욱 소중하다는 걸 깨닫는 것 같습니다. 신 죽음을 경험해서야 신 존재를 깨달은 예수의 제자들처럼, 좋아하는 사람의 빈자리를 느껴야 좋아하는 사람의 존재를 깨닫는 것처럼요. 늘 인간은 사라진 존재, 비어’있음’을 깨닫는 존재일 테지만요. 하느님은 예수의 존재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온몸으로 보인 것처럼 저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온몸으로 이해와 사랑을 건네어 소중한 관계를 이어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