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한번 붙들리면 강렬하게 사랑하는 스타일입니다.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말이죠.
신문이 그렇습니다. 이 신문 자유의새노래 말입니다. 신문을 만들 때면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밤이 되든 낮이 되든, 새벽에도 깨어 신문을 만들고 싶은 열의에 불타 오를 때 살아있다는 걸 느낍니다. 오후에는 신문사를 다니면서도 집에 돌아와서도 신문을 만드는 제 모습을 보며 혼자 낄낄 거리기도 했습니다. 저는 신문을 사랑합니다. 지금도 다음 호를 어떻게 만들지, 1면 배치와 레이아웃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그랬습니다. 신을 향한 경외심은 저를 밤낮 신앙인으로 만들었고, 교회 생활에 충성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몸을 갈아 바치며 교회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하지 않은 일이 없을 지경입니다. 청소부터 예배 인도, 학생회장, 주보 인쇄, 방송일, 교회학교 교사, 교회의 재정만 담당했다면 좋았을 겁니다. 어린 시절 저에게 교회는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내가 없다면 교회는 어떻게 유지 될 수 있을지를 걱정했습니다. 저의 미래보다 교회의 미래를 더욱 걱정한 것입니다.
신문과 교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10년 넘게 온몸으로 사랑하고 아꼈다는 점입니다.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면, 그 10년의 시간이 모두 저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또 다른 10년을 맞이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저와 생사고락을 함께할 무언가 말이죠. 한번 붙들리면 강력하게 사랑하는 스타일인 만큼, 아무거나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거나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바로 제가 사랑하는 것들의 특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까지 신문과 교회는 일방적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것들이었습니다. 신문을 만드는 일은 고달픕니다. 글을 열심히 써도 사람들이 많이 봐주질 않습니다. 교회도 그렇죠. 누가 교회 일에 헌신한다고 칭찬이라도 합니까. “잘했다” 격려 한 마디면 다행이죠.
이 유치한 짝사랑을 한번에 비집고 들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자친구요.
누군가는 사랑을 교통사고로 비유하곤 합니다. 제가 만일 그날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짝사랑으로 오래도록 시간을 낭비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자친구는 제가 사랑한 만큼 아니, 제가 사랑하는 것보다 저를 더 사랑해주는 동료이자 친구입니다. 제가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항상 응원해마지 않습니다. 저의 작은 것에 감사하고 감동하며 제 자신 그 자체를 사랑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런 여자친구와 오늘 300일을 맞았습니다. 어쩌면 여자친구가 제 새로운 삶의 여정을 열어주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 여정에 함께하려고 합니다. 앞으로도 말이죠. 10년의 우정과 10년의 사랑이 무색하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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