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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now]

하느님, 주님께로 가는 길이 멉니다.

입력 : 2018. 09. 08 | 수정 : 2018. 09. 09 | B13

 

서울, 희망여행 <3>

 

복합문화공간 1898 유리천장에서 바라본 명동성당.

 

 

장대비가 쏟아졌다. 확 내렸다가 금방 그칠 기세는 아니었다. 향린과 영락교회로 향하려다 피신해야했다. 예상과 달랐다. 명동성당을 마지막에 오려고 했는데…….

 

생각과 달리 여의도 순복음교회보다 명동성당에 자주 방문한다. 예배 시간이 아니면 대성전 문은 굳게 닫히기 때문이다. 개신교회보다 가톨릭교회는 교회 문을 활짝 열어 둔다.

 

그래도 피곤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다지만 하루 종일 걷느라 피곤이 쌓인 모양이다. 명동성당 지하에 위치한 1898에서 레모네이드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레모네이드 한 잔은 5분 만에 3분의 2가 줄어들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들어 날씨누리를 보았다. 오후 3시부터는 다시금 ‘구름 많음’이라고. 1898은 복합문화공간이다. 카페, 서점, 갤러리, 음식점이 즐비하다. 내게 이 공간은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제도권교회를 나오고 7개월 만에 신앙고백을 성문화(成文化) 한 다음 날 방문해, 카페에 앉아 낡은 공책에 성문화 문서를 재확인하며, 하느님을 묵상했으니.

 

헌데 지금은 글을 쓸 형편이 못 되었다. 논문을 꺼내들어 역사적 예수를 공부하려 했으나 상당히 피곤했다. 땀도 흘린 데다 비까지 내려 상체가 다 젖은 상태였다. 빗물인지, 땀인지. 찝찝함 속에 레모네이드까지 마셔댔으니. 감기 안 걸린 것도 용하다.

 

눈이 감겼다. 이대로 취침했다간 직원 분이 깨워줄 만큼 잠에 빠질 것 같았다.

 

명동대성당 복합문화공간, 1898/이 공간을 꽤 좋아한다. 인생에 몇 없을 사건을 이곳에서 보냈으니. 제도권교회를 나오고 7개월 만에 성문화 한 신앙고백, ‘자유화선언’은 다음 날 1898의 한 카페에서 재확인되었다. 집단에 의해 재구성된 신앙은 폭력이자 만들어진 이미지에 불과하다고.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시끌벅적함 속에 논문도 읽혀지지 않아 피로함만 느꼈다.

 

◇슈바르츠발트를 자임한 교회

성당으로 향하는 길목이 외로웠다. 여전히 비는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기요, ○○초등학교로 가는 길 아세요?”

“죄송합니다. 저도 여기 지리를 잘 몰라서요.”

“아, 네…. 비가 오네요?”

“그러게요. 갑자기 비가 내리네요.”

 

머쓱한 웃음을 짓고, 그가 비를 맞으며 밖으로 향했다. 우산이 있다면 씌워드렸을 텐데. 한 마디, 입에서 툭 튀어 나왔다. “주님, 당신께로 가는 길이 참 멉니다.”

 

교회에 가야지만, 교회에서 생활해야만, 교회의 권위를 인정해야만 구원 받는다라.

 

예수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메우려 성육신했다(히브 10,19-20).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희생했다는 내러티브가 또 있을까.

 

우산이 되어 준 그리스도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에게도, 타자에게도. 교회에도.

 

영원할 것만 같았던, 중세 신 중심 개념은 근대를 넘어 지금 여기에서 그 어떠한 가치도 발휘하지 못한다. 신은 어디에서나 편재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느덧 교회는 힘을 잃고, 사회에서 역시 교회 담론을 논하지 않게 되었다.

 

정밀해진 수학적 자연과학으로 체계로서 대상화 된 것은 근대의 특징이다. 현대기술문명에서 인간은 지배 가능한 존재로 생각한다. 죽어버린 신 앞에, 오직 주체가 되어버린 인간으로 탈바꿈했다. 하이데거는 이를 ‘의지에의 의지’라고 말한다. 현대인은 주체가 된 나 자신이 주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같은 것의 과다’에서의 자기 착취뿐이다. “자신마저도 철저하게 기술적인 처리 대상으로 만들어간다.”(하이데거 읽기, 2014)

 

기술 문명이 전개 되는 와중에 하이데거는 존재 망각을 보게 된다. 바로, 존재가 본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흥미롭게도, 김진호 님이 18년 전에 집필한 글이 떠올랐다. 그리스도교 신학 중에서도 신정통주의와 하이데거 철학을 간단 비교했다. 자유주의적 신학을 “교회 밖으로의 엑소더스, 대탈주 감행(201)”으로 설명한 것도 흥미롭지만, 문명 가운데 존재하면서도 원시림적 공간인 슈바르츠발트로 은둔해 존재의 위기를 벗어나려 한 하이데거 철학을 한국교회에 적절히 빗대었다. “인간주의적 파시즘 유혹을 떨치기 위한 절대 타자를 향하는 탈역사적 신앙으로의 여행 도정!”(우리 안의 파시즘, 2000)

 

신이 잊히며, 살아남아야 했던 교회가 택한 방식이다. ‘하늘’과 ‘땅’이라는 공간관. 이 공간관은 또 하나의 교회라는 게토(ghetto)를 낳았다. 한국 개신교인들이 ‘세상’과 ‘하느님 나라’를 분리해서 보게 된 시원(始原)이 아니겠나.

 

그 세상과 하느님 나라를 연결하기 위해 교회는 다시금 필요해졌다. 현대기술문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현대기술문명 속에 교회가 슈바르츠발트(Schwarzwald)로 자임하게 된 것이다.

 

 

갑자기 내린 비

오후 2시가 되자 장대비가 쏟아져 향린과 영락교회로 향하려던 계획 취소하고 성당으로

 

하느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예수와 인간 사이를 연결하려던 교회, 신정통주의에 이르러 “절대 타자”를 향한다지만……

 

고요함/교인들로 시끌벅적하거나 문 잠긴 개신교회와 분위기가 달랐다. 교회를 예배 목적으로만 사용하려다보니 예배 외 목적은 허용되지 못하는 걸까.

 

 

◇침묵, 마대걸레 스치는 소리만 “지─이익”

교회 문을 열었다. “나는 살아있다”로 자신을 표현하던 공기, 인식하지 않으면 흩어질 사람들 대화, 사진 찍기 위해 자세를 취하던 움직임, 바람의 속삭임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영원한 고요함으로 들어가는 듯, 아무 소리 없는 흑백 명동대성당에 발을 디뎠다. 하느님은 어디서나 편재하지만 감정과 내 몸은, 감각적 현실에만 충실했다.

 

의자에 앉아 피곤한 몸을 뉘었다.

 

 

 

 

 

 

형형색색, 스테인드글라스/명동주교좌성당은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스테인드글라스에 담긴 의미를 알고자 검색해 보았다. 마침 가톨릭평화신문사에서 2016년 특집 기사를 냈다. 명동성당이 지어지던 당시인 19세기. 당시 프랑스에서 고딕 성당 보수 작업이 진행됐다. 중세 교회 스테인드글라스를 복원하며 19세기 중후반에는 산업화, 대형화를 거쳐 대량생산했다. 따라서 세심하게 제작하기 힘들었고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신문은 그 시기에 명동성당 스테인드글라스를 수용했다고 밝힌다. 따라서 경로와 제작, 설치는 밝혀지지 않았다는데(다만 서명이 남아 있다고 한다. 궁금하면 직접 찾아보기를).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길을 잃어 방황한 한 마리 양을 찾아다니지 않겠냐고 물은 복음서의 예수(루카 15,1-7)가 떠올랐다. 그리고 또, 한 마디를 내 뱉었다. ‘하느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습관적으로 하던 말이었다. 때로는 절망 속, 언제 그랬냐는 듯 기쁜 마음에서, 피곤함 중에 몸을 뉘는 순간에도, 하느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신이 인간이 됐다’는 수사가 야훼 신앙사의 결정적 전환점이라는 초기 그리스도교적 문제 제기를 사실상 무효화시킨다. 왜냐하면 신과 인간 사이에는 다시 ‘영원의 늪’이 가로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는, 아니 예수와 인간 사이에는 또다시 중계자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 역할을 교회가 자임하게 된 것이다.”(우리 안의 파시즘, 2000)

 

예수를 통해 하느님께로 향하지만, 어느새 예수는 보이지 않게 되었고 예수 대신 교회가 버티고 섰다. 유감스럽게도 교회는 예수보다 더 중요한 존재로 자리매김 했다는 비판이다. 복음서의 예수와 한국 개신교회 예수는 서로 불일치했다.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원망도, 좌절도, 눈물도, 아무 것도 없었다. 빗물에 여전히 젖은 옷을 입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인식하고 눈을 감은 채, 30분 간 쉬고 말았다.

 

교회서 청소하던 분께서 스쳐 지나갔다. 마대걸레 소리만 지─이익.

 

어느새, 비가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