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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now]

[지금, 여기] 부정의 공간, 미지의 세계: 봉봉방앗간

자유의새노래 2019. 1. 27. 22:59

입력 : 2019. 01. 27 | 수정 : 2019. 01. 27 | 

 

반 년 만에 연락이 온 친구 목소리가 편하게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던 모양이다. 평소 가던 카페테라스를 제치고 발걸음을 옮긴 그곳, 봉봉방앗간.

 

주녕이가 입대하기 전, 처음 방문한 방앗간(2013. 12. 24)을 다시금 떠올린 건 작년 이맘 때였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일어나지 못하는 우울하고 무기력한 날이 이어진 겨울이 유난히 추웠다. 왜 힘이 없는 걸까, 잃어버린 의욕은 어디로 숨은 걸까. 일어날 마음이 없었다.

 

입대 일주일 전, 주녕이와 함께 찾은 봉봉방앗간(2013. 12. 24).

 

 

재미없는 학교를 나와 미지의 세계로 향했다

고1, 하교 시간은 밤 10시였다. 보충학습 6시 35분이 지나면 맛없는 저녁을 먹고 딱딱한 의자에 앉아 시시덕거리던 학우를 바라보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공허함인지 물었다. 빈 공책을 숫자로 가득 채우고, 때론 글자를 빽빽하게 때우며 지루한 이 시기가 지나갔으면 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재미없는 일상이 끝나기를 바랬다. 교육감이 바뀌고 시대는 달라졌다.

 

도서관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1층, 자유로운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 열람실처럼 여닫을 때마다 눈치를 보게 만드는, 닭장처럼 책상에 옴짝달싹 붙어버린 재미없는 사람들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자유롭게 챡─챡─ 신문을 넘기며 흘러온 하루를 넘겨짚어도 된다. 친구와 두 자리를 잡아 시험공부를 할 수 있고, 옳고 그름을 토론해도 된다. 일상이란 재미없는 공간인 학교에서 벗어나, 저녁 6시 35분이 되면 도서관 1층, 자유로운 공간으로 향했다. 그곳은 석식이 없지만 커피는 있었다. 믹스 커피. 저녁을 먹지 않아 배고팠지만 1,500원만 있어도 배불렀다. 3년을 함께한 다이제와 300원 믹스 커피.

 

는 무한의 공간이자 미지의 세계였다.

 

재미없는 교회도 그랬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행동, 같은 생각. 아멘에 중독이라도 된 듯 좀비처럼 전염이 된 아멘 소리에 기겁하자 일상에서 벗어나듯, 교회를 떠났다. 봉봉방앗간도, 그래서 찾았다. 평소 ‘일상’이란 카페테라스에서 만나야 했지만 이 날 친구가 내게 요청한 건 “봉봉방앗간에서 보자”는 메시지였다. 떨리는 목소리, 무언가 힘들고 고달픈 음성메시지였다.

 

그 때, 그 하늘(2013. 7. 16).

 

 

공포감, 살기 위해 당연해야 할 소외

혹시나 일상에서처럼 무슨 요일에 만날지, 몇 시에 만날지. 어디서 만날지를 정하지 않아 불편했는지도. 그렇지 않다면 목소리가 떨릴 리 없었다. 악수를 나누고 월화거리를 지나 방앗간으로 향하는 동안 일상적 인사와 메시지를 나누었다.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일상 너머 본심을 숨긴 채, 서둘러 향한 봉봉방앗간은 여전했다.

 

외관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뀐 것은 가게 안 사람들이고 2층의 액자였다. 레몬차도, 유자차도 아닌 귤차를 주문하고 앉은 자리에서 물었다. “나, 일 그만뒀다.” 장황하게 시작한 해명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가 아닌 “저지르고 말았다”였다.

 

예상치 못한 지수앓이를 하던 그 날도 봉봉방앗간을 찾았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말이다(2018. 2. 10).

 

 

기계처럼, 공장이듯 물건을 찍어 만들어낸 공산품이 내 손에서 벗어나 나의 것이 아닐 때, 오히려 나의 것이었던 물건이 공산품이 되어 나를 먹여 살리고. 먹여 살려야 할 물건을 위해 살아갈 때 마르크스는 ‘소외(疏外)’라고 불렀다. 팔만 뻗어도 사람이 있으나, 있는 것 같지 않은 그곳은 공장이었고 노동자가 되어버린 내가 나의 것에서 멀어져야 할 소외감을 견디지 못해 그곳을 나와 버렸다. 고 말했다.

 

마치 땅 바닥이 사라지는 듯한 공포감. 아무도 나와 함께 존재 할 사람들이 없는 그곳, 나는 그곳을 공장으로, 나를 노동자로 불렀다.

 

공산품이 될지라도 하나하나 소중한 마음으로 클라이언트를 위해 생산하길 바랬지만 우리 사회에 기다림이란 당연하지 않았고, 당연하지 않기를 강요되어야만 했다. 기다림은 돈이 되지 않는다. 빨라야 하고, 멀티태스킹도 이루어져야 한다. 살기 위해 공산품을 찍어내야 하고, 먹기 위해 소외되어야만 하는 일상이 지겨웠고, 공포감을 느꼈다.

 

상사가 직접적으로 공포감을 유발한 건 아니었다. 다만, 내가 소외되는 광경을 지켜보길 견뎌내기에 모자란 인간이었다. 유감이었다.

 

은석이와 함께 찾은 방앗간(2018. 7. 14). 이곳은 원래 방앗간이었다고 한다. 무더운 여름, 레몬차를 주문해 원샷할 만큼 찌는 여름이었다.

 

 

미지의 세계를 생각하다

친구는 나와 다른 공포를 느꼈다. 정확하게 말하면 공포는 아니었고, 불안이었다.

 

기말고사를 치루던 11월부터 시작된 불안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집에 혼자 쉬노라면, 어디선가 다가오는 무기력을 견뎌내기 힘들었다. 번아웃(burnout)은 번아웃이지만 이제껏 겪어본 번아웃과는 다른 소진이다. 그래서 불안이자 공포였던 것이다.

 

혼자서 집에 박혀 밖을 나가지 않는 동안 이러저러 생각을 많이 했다. 나는 물었다. 그 생각이 특별한 사건인지, 아니면 화살표로 그릴만한 기점인지. 사건이나 기점은 아니라고 한다. 그냥 생각나는 생각, 스쳐가는 기억. 그리고 우리는 미지의 세계를 생각했다.

 

미지의 세계는 이미 존재하는 곳이지만 일상이 아닌 세계이자 일상 밖의 공간이다. 학교에서 벗어나 미지의 세계, 도서관으로 향했듯이 방이라는 일상에서 벗어나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일을 그만둔 오늘이 나는 믿겨지지 않았다. 고작 2주였지만 말이다.

 

매번 찾을 때마다 느끼지만, 직원은 놀랄 만큼 친절하다. 정말 친절하다.

 

재독철학자 한병철은 부정을 ‘힘’으로 이해했다. ‘할 수 있음’만이 힘이 아니라 ‘할 수 있을 수 없는’ 것도 힘이라고, 같은 일상이란 긍정에서 같은 일상을 벗어날 부정의 힘을 생각했다. 일상을 하지 않을 힘, 일상을 벗어날 힘. 미지의 세계가 입 밖에서 나오자 동공이 커졌다. 미지의 세계라니!

 

누구에게나 세계관은 존재한다. 나의 세계, 너의 세계, 그리고 공간. ‘나’라는 정체성을 가진 채 나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자폐(긍정)’라고 말한다면, 미지의 세계는 자폐에서 벗어날 부정일 것이다. 매일은 어려울 테니, 일주일에 한 번, 아니면 두 번. 미지의 세계를 가라고 말했다. 처음 가본 카페, 혹은 거리. 또는 서점이기도 하다. 결정하는 건 우연일 수도 있고 점찍어 둔 ‘내 맘대로’ 일수도 있다. 따라서 미지의 세계는 무한의 세계이기도 하다.

 

미지근해진 귤차를 호로록 마시자, 남아버린 귤까지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불안과 공포를 겪자 한 모금도 들이키지 못한 귤차를, 카페에서 나설 때쯤 되자 흔쾌히 마시고 말았다.

 

이 순간만큼, 불안과 공포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을 테다. 미지의 세계에서 일상으로 돌아간다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