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우[now]

죽음과 현실의 경계 앞에서, 바라본 마르크 샤갈 특별전 영혼의 정원 展

자유의새노래 2018. 9. 9. 18:08

입력 : 2018. 09. 09 | 수정 : 2018. 09. 09 | B12

 

서울, 희망여행 <2>

 

교과서에서 마냥 바라본 샤갈은 재미없고, 딱딱하며 알 수 없는 이상한 그림을 그리던 화가에 불과했다. 이제야 고통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느껴가며 새롭게 샤갈을 느꼈다.

 

“우리 인생에서 의미를 주는 단 하나의 색은 사랑의 색깔이다.”(샤갈, 내 영혼의 빛깔과 시, 2004)

 

이 한 문장이, 교과서 속 샤갈. 그리고 인간으로서 드러난 샤갈과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미술 전공이 아닐뿐더러 유대 계 독일 학자들을 좋아한 나머지 샤갈과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이 여행 이름을, ‘서울, 희망여행’으로 정한 것도 샤갈 덕분이다.

 

사람을 평가한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고 잔인한 일인가. 그럼에도 이 문장은, 샤갈을 다시 인식하게 도와주었다.

 

M컨템포러리에서 전시한 마르크 샤갈 특별전: 영혼의 정원은 4월 28일에서 8월 18일까지 진행됐다.

 

샤갈 作, ‘파리의 전망’(1960)

 

샤갈 作, ‘위대한 누드’(1952)

 

 

 

◇하시디즘, 삶으로 예술을 그려낸 샤갈

마르크 샤갈(1887~1985)은 삶을 예술로 그려낸 화가다. 유대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샤갈은 비테프스크와 하시디즘 유대교, 성서에 영향을 받았다.

 

하시디즘을 율법의 내면화, 초월적 기쁨을 경험하는 것. 미래적 메시아사상의 현재적이자 내재적인 개념을 강조했다고 말하면 무슨 의미인지 이해를 못할 지도. 하시디즘 유대교는 하느님과의 교제를 강조하며 모든 영역에 신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내면의 빛을 강조하며, 고요함 속에 영적인 경지를 경험하려는 개신교의 퀘이커와 비슷하다.

 

느껴진 이미지는 종교적 색채이기보다 스쳐지나가 잊힐만한 일상에 귀를 기울이는 샤갈의 모습이었다.

 

샤갈 作, ‘도판 15’(1968)/샤갈 작품에서 에펠탑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샤갈 作, ‘도판 1’(1968)/성서 인물을 그리기도 한 샤갈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 땐 몰랐는데, 전시회의 아쉬움

그렇다고 모든 일상에 낭만적일 필요는 없다. 낭만적인 것과, 샤갈같이 삶을 예술로 승화하는 건 다르다.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언 신학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인 강남순 님은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낭만적인 건, 어두운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고.

 

웃으며 어두움을 의도적으로 가리는 사람이 무서운 법이다. 어두운 것을 보며, 세상사는 이치를 배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던가.

 

제 1차 세계대전을 겪고, 러시아에서 2월 테제와, 10월 테제를 겪으며 화가로서 살아야 했던 샤갈이 와 닿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전시회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 땐. 돌아와 전문리뷰에서 신랄하게 까이던 전시회가, 왜 당시 그렇게 느껴졌는지 뒤늦게 알게 되었다. 샤갈 작품은 참 많았다. 많아서 좋았지만,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렇게 전시를 한 건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샤갈, 삶을 예술로 그려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비테프스크, 하시디즘, 성서에 영향 받아, 일상에 귀 기울여

 

샤갈을 마주한 이유

어두운 시대를 지나 화가로 살아 온 샤갈이 와 닿은 이유는 낭만적이지만은 않았기 때문

 

삶에 경이를 느낀 샤갈이었을까

260여 점을 전시해 두 줄로 배치하기도… “샤갈을 복제해 둔 것 같았다” 상투성이 아쉬워

 

샤갈에게 실망하지 않다

벨라와의 사별, 현실 속 고통 중에도 화가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샤갈을 더 알고 싶어

 

 

◇샤갈을, 담아내긴 한 걸까

작품은 상당히 많았다.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두 줄 가로로 죽, 늘여놓은 샤갈이 마치 복제품처럼 느꼈을 정도니. 나처럼 전시회를 잘 방문 않는 사람에게 더할 나위 없이 단독자이자, 삶에 경이를 느낀 샤갈로 인식되기엔 힘들었다.

 

시커멓게 그려진 판화를 보며, 애써 샤갈의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 길이 없었다. 샤갈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작품이, 그 작품 같아보였다.

 

260점, 판화로 가득한 작품 중에 기억에 남는 건 태양을 움직이려던 여호수아, 성서, 인간의 욕망. 샤갈이 벨라의 죽음 앞에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샤갈이란 정체성을 위협받을 때의 감정, 상황. 고통 중에서도 화가임을 포기하지 않은, 샤갈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를 단순히 자본주의화 된 상투적 에로스로만 그려대니, 당연히 샤갈의 흔적에 남아 판화가 일러주는 그의 아픔을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다.

 

샤갈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20세기 전대미문 전체주의 체제가 가져다 준 고통과 아픔은 전시장의 샤갈만큼 이질적이진 않다. 예술 작품 연출이, 왜 중요한지를. 이번에 알게 되었다.

 

샤갈의 서명.

 

샤갈 作, ‘신랑신부와 천사’(1981)

 

◇더 알고 싶은 샤갈

동 시대 화가, 피카소와 친했다고 한다. 점심식사하다가 언쟁을 높이게 됐고, 샤갈이 박차고 일어나 그와 두 번 다시 만나질 않았다고. 김종근 미술평론가는 피카소에게 심한 열등감을 가지지 않았나 추측한다. 샤갈 앞에서 구하기 힘든 가솔린으로 큰 차까지 굴려댔으니. “피카소는 누가 뭐래도 거장이다. 나는 결코 그들처럼 위대한 명성을 얻지는 못할 거야.”(샤갈, 내 영혼의 빛깔과 시, 2004)

 

샤갈이란 인간적 면모. 피카소 앞에 자신의 천재성을 자학으로 부정하는 모습에서 오히려 샤갈을 더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미학이 전공이 아니라, 예술에서의 옳고 그름을 논할 자격은 없다. 그렇지만 그가 살아온 배경, 화가로서의 삶. 풍경을 넘어 삶에 경이(驚異)를 느낀 샤갈을 알고 싶었다.

 

전시장은 총 2부로 나눠진다. 1부는 촬영이 불가능해 아쉬웠는데, 고통 중에도 화가이자 인간으로서 삶을 이어 간 샤갈을 표현한 문장 때문이다. 잊을 줄 알았다면, 기록이라도 해둘 걸 그랬나보다.

 

벨라와 헤어지며, 슬픔을 극복해 간 샤갈. 어쩌면 극복보단 끌어안으며 아픔과 함께 지낸 것이 아닐까.

 

“모든 풍경 앞에서 나는 감동을 받는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나 삶에서 부딪히는 어떤 일에서도 똑같은 감동을 받는다.”(샤갈, 내 영혼의 빛깔과 시, 2004)

 

샤갈 作, ‘크고 빨간 부케’(1975)

 

전시 후, 포스트잇으로 도배 된 방명록.

 

 

*비평 리뷰를 원하시는 분은, 여기를 참고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