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사의 정의
소녀사는 한 사람의 과거사를 읽는 범주 중 하나다. 정치사, 해방사, 은혜사와 구분되는 이 갈래는 신 죽음의 시대가 끝나고 재건이 시작된 2019년 6월 이후의 시간을 소녀의 관점으로 읽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소녀사의 역사적 주체는 교회나 공동체가 아니라 인간 한 사람이다.
소녀사가 시작되는 지점
해방전후사(2016~2019)를 통과하면서 신의 죽음을 천천히 몸으로 경험했다. 공허와 해리의 끝에서 2019년 5~6월 신의 마지막 음성 "갈릴리로 가라"와 함께 신 죽음의 시대가 종료되고 재건의 시대가 열렸다. 캐릭터 문소혜(2021)는 소녀사의 시작점이 아니라 재건의 결과물이다. 소녀사는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내면서 재건된 역사다.
소녀사의 핵심 주장
소녀사는 망가진 과거를 복원하거나 지우려는 시도가 아니다. 죄책감과 왜곡의 언어로 씌워진 과거를 소녀의 감각으로 다시 읽음으로써 새로운 윤리적 언어로 재배열하는 작업이다. 기독 담론이 소녀를 죄인으로 규정했다면, 소녀사는 그 규정을 거부하고 소녀를 신의 질서를 거스르고 지금 여기에 선 존재로 다시 읽는다. 선악의 이분법이 아니라 헛발질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발견하는 것이 소녀사의 시야다.
소녀사가 다른 역사 범주와 구분되는 이유
정치사, 해방사, 은혜사가 외부 사건이나 신앙의 언어로 구분되는 범주라면, 소녀사는 내부에서 인물을 만들어내는 것에서 출발한다. 학문적 사관이 아니라 개인의 과거사를 읽는 범주이며, 소녀소년담론이 담론에서 신앙으로, 다시 사관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된 갈래다. 소녀사의 목적은 과거를 소급해서 소녀의 눈으로 다시 읽는 것이며, 그 읽기가 소설을 비롯한 창작 전체를 관통하는 토대가 된다.
소녀사 관점의 과거사 시대 구분
기독 교권주의 체제 안에서 살아간 시간. 신앙, 사회적 관계, 정체성, 세계관이 모두 공동체 안에 조직된 시기. 신의 침묵이 시작되기 전까지를 실질적 교권주의 시대로 본다.
신의 침묵으로 시작해 마지막 음성 "갈릴리로 가라"로 종료된 약 4년 9개월. 새능력 탈교(2016.3), 버뮤다순복음교회 해체(2016.8)는 이 시대 안의 사건들이다. 2017년 3월 신학교 복학과 신학적 회의, 2017년 6월 타자 담론 시작(여성을 적이 아닌 타자로 받아들임), 2017년 10월 지혜문학 비평을 통해 신 죽음 애도. 2018년 해리(기억의 공백). 해리는 개인의 심리적 취약함이 아니라 공동체가 탈퇴자에게 가한 관계 청산이라는 구조적 폭력의 결과였다.
정치사·은혜사의 층위에서 읽는 하위 범주. 새능력을 탈퇴(2016.1~3)하면서 2019년 10월로 종료. 약 3년 9개월. 신 죽음의 시대와 시간적으로 겹치나 다른 층위에서 동일한 시간을 읽는 범주다. 해방전후사의 종료는 너머 담론의 촉발점이기도 하다.
"갈릴리로 가십시오" 신의 마지막 음성으로 신 죽음의 시대 종료. 구체적인 인간을 향한 욕망이 열리면서 해리에서 탈출. 2019년 2월 학부 졸업 후 사회 진출. 2020년 본격적으로 시·소설 창작 시작. 2021년 1월 1일 신문 시 코너 문소혜 출범, 2021년 5월 캐릭터 문소혜 탄생 — 소녀사의 시작. 폐허 위에서 소녀를 만들어내며 재건하는 시간. 소녀소년담론의 토대가 이 시기에 구축됨.
2025년 10월 기독교 담론 공식 종료 선언. 소녀소년담론을 삶의 운영체제로 전면 채택. 신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나 전통적 기독교 담론을 삶의 기반으로 삼지 않음을 선언. 유신론적 직관은 유지하되 신과의 관계는 열어둔다. 절대자의 구원 대신 인간 상호 간의 구원과 연대, 대화를 실천 윤리로 삼는다. 재건의 시대가 해체와 재건의 과정이었다면, 신앙 주권주의 시대는 그 완료 이후 소녀소년담론을 전면에 세우는 선언의 시대다.
소녀소년담론
소녀소년담론은 한 개인의 과거사를 다시 읽는 작업에서 출발했으나, 그 자체로는 한 사람의 이야기에 갇히지 않는다. 신 죽음의 시대가 남긴 폐허 위에서, 절대자의 언어로는 더 이상 설명되지 않는 삶을 어떻게 다시 서술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다.
담론의 중심에는 두 인물이 있다. 소녀는 억압 속에서 죽은 것으로 취급되었던 성정이며, 소년은 그 소녀를 다시 불러낸 또 다른 자아다. 둘의 관계는 대립이 아니라 화해이고, 화해의 결과는 부활이 아니라 회복이다.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소녀소년담론이 기독교적 구원 서사의 변형이 아니라 그것과는 다른 문법으로 작동하는 서사이기 때문이다. 절대자가 인간을 구원하는 구조 대신, 인간이 인간을 살려내는 상호적 구원을 골격으로 삼는다.
이 담론은 세 층위에서 작동한다. 먼저 신앙으로서, 전통적 기독교 담론을 삶의 운영체제로 채택하지 않으면서도 신 존재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 유보된 태도를 취한다. 다음으로 윤리로서, 선악의 이분법 대신 어그러짐과 성찰, 관계와 대화를 인간을 이해하는 척도로 삼는다. 마지막으로 사관(史觀)으로서, 개인의 과거를 소급해 다시 배열하는 읽기의 방법론이 된다. 소녀사는 이 사관이 구체적으로 적용된 결과물이며, 소설을 비롯한 창작 작업 전체가 이 읽기 위에 서 있다.
이것은 특정 종교의 대체물도, 반(反)종교의 선언도 아니다. 신 죽음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그 삶을 누구의 언어로 서술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한 기록이다.
[에셀라 시론] 소녀의 이름으로
나는 이제껏 김용철의 새능력을 왜 더 빨리 탈퇴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괴로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좀 더 빨리 탈교(脫敎) 했다면, 조금 더 빨리 관계를 정리했더라면…. 소년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은 우연히 입수한 18년 전, 한 영상을 보면서 오롯이 해소되었다. 연세중앙교회 YBS 인터뷰에 담긴 소년은 짐짓 말할 수 없는 모든 죄를 짊어진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알고 지은 죄인데 왜 그걸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했는가…." 도대체 중학교 2학년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카메라 앞에 서서 자책하며 스스로를 옥죈단 말인가.
신앙주권주의 시대 이후
신앙주권주의 시대의 선언은 종착점이 아니라 다른 작업의 시작점이었다. 기독교 담론을 삶의 기반에서 내려놓는 일과, 그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를 묻는 일은 서로 다른 과제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선언으로 완결되지만, 후자는 매번의 문장과 매번의 선택으로만 증명된다.
지금 진행 중인 작업들은 그 증명의 자리다. 소설은 소녀사의 읽기 방식을 허구의 형식으로 옮겨, 김수영의 문학적 자장 속에서 소녀와 소년이 통합되어가는 과정을 다시 쓴다. 자유의새노래는 신앙의 언어가 아니라 기억 보도의 언어로 시대를 보도하는 자리이며, 문장공방은 그 기록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묶어두는 그릇이다. 셋은 형식은 다르지만 같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절대자의 언어가 사라진 자리에서, 무엇으로 삶을 서술할 것인가.
소녀소년담론은 완결된 체계가 아니라 계속 쓰이는 사관이다. 신과의 관계를 완전히 닫지 않은 채로 열어둔 것처럼, 이 담론 또한 다음 문장을 위해 열려 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전의 신앙으로 돌아가는 길은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이 상실이 아니라 다음 기록의 조건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