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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now]

[주마등] 초등학교 6학년 7교시

자유의새노래 2020. 11. 14. 18:43

입력 : 2020. 11. 14  18:43 | B2-3

 

 

똑같은 복장 교시 건물 기분
학교를 벗어나 오르던 후문
따뜻한 떡볶이 종이컵 들고
걸었던 머나먼 이 거리에서

 

막상 6학년이 되어 봐도 학교는 여전하게 보였다. 오후 넘어 6교시를 마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얼마 전의 충격은 더는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학교는 싫었다. 방학 중에 뜯어고쳐 기름칠이 필요 없던 바닥으로 때 벗긴 듯 가공된 나무 바닥. 마루처럼 날카롭게 긁어 왔을 낙서된 쾌쾌한 나무 책상과 의자 대신 높이 조절 가능했던 스마트 책걸상. 천장형 히터가 들어오기 전까지 교실 한 가운데 펑퍼지게 차지했던 난로 냄새도 정겹지 않았다. 청소가 끝마친 춥디 추운 교실을 벗어나 내가 하고 싶은, 그저 기억 속 따뜻했던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얀 철제 의자 거꾸로 올려 두고 빗자루 들어 친구들과 청소를 마치고. 검정색 가방을 매고 책상에 걸렸던 초록색 신발주머니 들고서 달려간 곳 컴퓨터실. 암산셈 수업까지 다 받고나면 마치는 시각은 오후 4시. 부리나케 언덕배기 후문(後門)으로 하교할지, 지루하던 내리막길 정문으로 돌아갈지 고민한 끝에 오백원 떡볶이 사먹으며 돌아가면 더 좋겠구나 마음먹고, 할머니 계시던 후문으로 향했다. 아직도 선하던 한 마디 “이 놈 새끼들아!” 고함지르던 문방구 할머니는 연로한 탓에 훔쳐가는 선배 새끼들 절도에 욕바가지 한 소리 밖에 못하셨다. 그게 고작 몇 년 전 일이라니.

 

문방구 할머니 떡볶이가 생각나는 후문

계절마다 유혹의 강도는 다르다. 더운 여름엔 뜨겁고 달달한 떡볶이가 눈에 차질 않더니, 금세 싸늘해진 가을 탓에 생각나는 건 역시나 떡볶이였다. 매운 걸 먹지를 못해서 적당히 매콤하고 달달하게 만들어 놓은 문방구 할머니의 떡볶이는 가을에야 유혹으로 다가왔다. 그 옆에 공부방에서 만든 떡볶이데이에 “쉿, 할머니한테는 비밀이야”라는 할머니 모르게 먹으라던 말씀에도 매일 사먹고 싶었던 그 떡볶이는 문방구 할머니가 만들어준 손맛에 마지막 끝 맛까지 생생하다. 빼곡히 진열된 물건들, 자세히 말하자면 천 원짜리 샤프들, 알록달록 지우개, 공깃돌, 구슬, 목공용 풀, 스케치북, 열 줄 공책, 일기장, 실내화, 농구공, 자동차 레고. 아이들이 서성이던 웃음소리, 시끌벅적 엄마와 손잡고 하교하던 풍경들.


암산셈 마치고 돌아갈 즈음 모두가 하교하고 나머지 공부하던 아이들 제하면 몇 없던 해질녘. 다 팔아가던 차 더 얹어줄 것 같은 그런 시간에 찾아가 문방구 할머니에게 500원 드리면 종이컵 그득히 국물까지 챙겨주던 고마운 시간이다. 가을이면 적당히 따뜻한 온기를 손바닥으로 느끼며 종이컵을 살짝 쥐면 찬바람이 느껴질 만큼 곧 겨울이 오겠구나 싶은 시간에 하교했다. 갑갑하게 느껴졌던 학교에서 벗어나 비로소 수업 끝나고  하고 싶었던 것, 뭐하며 놀지 생각만 해도 즐겁던 해질녘 하교는 40분. 6교시의 연장선이었다.


체육복 갈아입기도 부끄러운 그런 성향에 싸늘한 기온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점심 먹을 쯤까진 더웠던 교실 공기가 자유를 맛보고서 싸늘해진 분위기는 다 같은 학생들에게 흰색 체육복을 입힌 듯한 기분이다. 다양성, 창의력, 새로움을 가르치면서도 정작 학생에겐 똑같은 복장, 똑같은 교시, 똑같은 건물에 획일적 삶을 요구하다 사회로 나가면 싸늘해진 그 분위기가 온전히 나의 몫인 듯한 분위기.  집에 돌아가면 하는 일은 뻔했다. 컴퓨터 아니면 텔레비전보기. 그나마 잘 사던 애들은 여러 개 학원이나 다니면서 만들어준 인생 설계대로 지냈겠지마는. 남의 삶은 부럽지 않았다. 이제 막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즐거움과 추위를 타지 않던 독특한 체질은 흰색 체육복을 입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 싸늘한 이미지로 남지 않게 만들었다. 40분. 집까지 걸어가야 할 꽤나 먼 길이지만. 6년을 걸어온 덕분에 조금도 낯설지 않았고. 지루하긴 했기에 오늘은 생각을 다르게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정해진 하굣길 루트는 두 가지. 정문으로 가느냐 후문으로 가느냐. 정문으로 가는 방법은 단순했다. 언덕에 위치했던 학교를 벗어나 큰 길로 나와 둥그런 큰 길을 지나 직각으로 좌회전해 직진만하면 도착한다. 그 단순한 길도 심심했고 재미가 없었다. 그러나 후문에서 집으로 향하는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어쩌면 30분을 1시간으로 늘려도 즐거울 것만 같은 신비로운 길목이다. 가끔은 두 갈래도 나오고, 네거리도 나오며 건물 사이를 비껴가고 어디에서 어디로 가도 어쨌거나 우리 집이 나오는 건 분명했다. 따라서 오늘은 이제껏 정해진 루트가 아닌, 학교 후문으로 빠져나와 떡볶이와 함께 집으로 걸어가기로 했다.

 

적막한 은행나무 잎 놀이터
오르고픈 돌담길 위 나무집
평범한 망초 아파트 단지와
도착할 무렵의 주황빛 하늘


은행나무 놀이터와 망초 아파트 단지를 지나
학교 뒤편에는 5층짜리 아파트 단지가 우후죽순 서 있었다. 지금이야 단지마다 아파트를 움켜쥘 요량의 철제 펜스가 장미꽃과 함께 서 있을 테지만. 회색 벽 바라봐도 냉기만이 느껴지던 아파트 구석에 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자 우리 집 향하던 길목으로 요긴하게 지나칠 줄 상상도 못했다. 단지를 벗어나 내리막길 주택가로 향하면, 언젠가 아침 등굣길에 지나쳐 본 기억이 스쳐간다. 빠빰 빠빰 빰빠암- 소리에 오줌 쌀 뻔한 이유도 워낙 정해진 틀, 약속, 규범, 규칙에 조금도 벗어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지루해질 아침이 아니라 저녁이 가까워질 해질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 속에 건물들이 훤히 보이던 언덕에서 바라보던 풍경은 고사하고 곧 가팔라질 내리막길 생각에 갑작스레 마음도 조심스러워졌다.


시멘트 대충 발라 놓은 지금의 원룸들 사이에서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딛다 소형차 하나 주차할 만한 사이즈의 맨바닥에 합류하면 비로소 아스팔트 시꺼먼 양방통행로가 보인다. 도로로 진입하면 은행나무 잎 수북하게 쌓인 놀이터가 보인다. 하루에 몇 대밖에 지나치지 않을 이곳은 펀치볼 같은 지형이라 버티다 못해 떨어진 나뭇잎이 유치원 앞으로 모이고 만다. 미끄럼틀, 정글짐도, 그네와 시소도 없지만 노란 나뭇잎을 모아 침대를 만들고 자전거에서 막 내린 동생이 그 위에 폭삭 주저앉는다. 엉덩이 시리던 서늘한 바람에 은행나무 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이것저것 손바닥으로 끌어 모은 나뭇잎에 부자가 되어 작은 놀이터를 즐기느라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그러다 다가온 주인 모를 강아지를 만나고서 키우고 싶어 하던 동생의 간절한 바램에도 두고 가야 했던 어쩔 수 없는 이별에 아쉬움을 뒤로 한다. 어린이집 차를 타고 지나치던 이곳 아스파트 발라 놓은 양방통행로가 지나쳐야 했던 기억 속 소거된 길일 테지만, 둘이서 놀았던 작은 놀이터라는 사실을 나와 동생만이 기억할 것이다.


펀치볼 놀이터를 지나치고 작은 언덕을 오르면, 이제부터 10분 동안 직선으로 이어진 내리막길 사이에서 맛집으로 보이는 국수집과 가정집, 저물어 가던 노을이 얼굴을 비춘다. 따스했던 햇살도 잠시 내 키보다 높은 담장 속 집집들에 마주하면 더는 내려갈 곳도 없어진다. 그런 낮은 동네에서 지내던 자칭 형을 만났는데, 영화에서 봄직한 추레하던 츄리닝을 입고 나온 이름 모를 형이 돈 얼마나 있느냐고 물은 때가 생각난다. 돈이 없다기에 손바닥 좀 내밀라며 “400원밖에 없네?”하고서 500원 웃돈 얹어준, 누가 봐도 이상해 보이는 그런 형을 지나쳐야 숲 속으로 향할 수 있다. 개발되지 않은, 작은 숲을 지름길 삼아 지나쳐야 비로소 우리 집이 보인다. 여름에는 줄곧 지나가질 않았다. 거미가 많은 탓. 가을 무렵, 지금처럼 싸늘해져야 징그러운 호랑거미를 마주치지 않을 수 있다.


숲에는 비밀이 있다. 등교할 때만 슬쩍 쳐다보던 꽤 운치 있을 나무 집이 숲 사이에 건실히 세워져 있었다. 뜨거운 햇살을 받던 아침엔 호랑거미가 무섭다가도 누가 사는 집일까 생각했고, 오후엔 돌담길을 올라 집 구경 하고픈 모험심을 발동하게 만든 남의 집이었다. 초등학교 입학해서 딱 한 번 가본 적 있던 이 집엔 여전히 혜선이가 살고 있을는지. 이사 간 후로는 희미하게 남아버린 집안 한 가운데 지붕에 매달린 창문에서 내리쬐는 낭만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싸늘한 바람에도 좌, 우 쳐다보지 않아야 거미와 마주치지 않을 지름길을 지나, 아파트 마냥 자라난 초록빛 망초들과 그 사이에 핀 개망초, 뱀딸기는 환삼덩굴과 엉켜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구가한다. 망초 1,2,3단지를 지나면 주황빛 물든 우리 집이 멀리서도 보이는데. 이쯤 되면 ‘10분만 더 걸어가면 도착한다’고 되뇌곤 했다.

 

 

 

 

이제 그 길이 사라졌다.

 

어느새 끊어진 저녁과 내일
신경증적 불안과 코로나가
나에게 나를 향해 엄습해도
기억들은 인간의 고유한 것


지난 날을 복기하며 내린 결론, 불안할 필요는 없었는데
집에서는 좀체 공부하질 않았다. 노는 게 재밌었기 때문이다. 컴퓨터 한 시간도 허락 받아야 했던 그 시절. 요정 컴미, 매직키드 마수리, 울라불라 블루짱, 마법전사 미르가온, 화랑전사 마루까지. 6학년까지 챙겨본 어린이 드라마 끝나거든 따뜻한 보일러 바닥에 엎드려서 꾸역꾸역 해낸 숙제 밀어낸 후, 빈 공책 열고서 그리고픈 백화점, 도시, 나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다보면 어느새 일기 쓰고 자야할 시간. 오디오를 켜고 주파수를 맞추면 들려오는 지명현의 클릭비전, 박종호의 가스펠 아워. 그리고 내일은 또 다시 찾아온다.


어느새 찾아온 오늘의 불면증 배후에는 다가 올 내일의 공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일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왜곡된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신경증적 불안으로 자리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오래지 않다. 졸업과 함께 사라진 해질녘 7교시가 저녁과 새벽을 넘어 내일로 자연스레 연결되던 마음가짐 어쩌다 무너지게 되었나, 고민해보니 내일의 공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공포는 아주 오래된 것이다. 다만 익숙해진 초등학교 고학년에 이를수록 잠깐 동안 잊고 있다, 다시 중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 학부 1학년처럼 무엇이든 처음 내딛는 환경이면 다시 살아나는 친구를 정체 모를 괴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괴물의 정체가 드러나고 늘 나와 함께 했던 노을빛 뒤로 보이던 그늘진 싸늘함을 알게 되고부터 내일의 공포에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달아날 수 있었다.


영하로 떨어져도 추위에 떨지 않았던 체질은 어렸을 이 무렵에 완성되었다. 주머니에 손 넣기보다 빼어내 도리어 얼리라면 얼려보라는 깡으로 40분만 아니, 1교시만 견디고 또 견디면 된다는 마음으로 학교서 집으로 걸어간 날들만 수년. 무엇을 고민했을는지, 세밀히 기억나잖지만 내일도 학교 가서 돌아올 오늘의 해질녘 1교시는 여전하다는 즐거움만은 분명하다. 그 마음과 생각이 몸에 벤지도 오래.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도 내일의 돌아갈,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걸을 수 있는 해질녘 하굣길 1교시가 떠오른 건 초등학교를 지나치다 본 ‘가을 운동회’ 플랜카드. 6학년 가을 어느 날, 운동장 끝자락의 정글짐에 올라 친구들과 “내년이 되어도 잊지 말자”는 인사가 떠오르고. 저 시절은 좋았었지, 라는 향수에 젖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여전히 코로나가 요동하는 파동 속에 내일을 걱정하는 수많은 목소리가 싸늘한 기온을 증언한다. 나도 그렇다. 두렵다. 무섭고 공포스럽다. 사회 속에 살아남을 개인은 항상 나약하고 힘이 없고 눈물 난다. 그래도 떨리는 손, 주머니에 넣지 않은 채 얼리라면 얼려보라는 깡으로 주황빛, 해질녘 1교시를 떠올린다면 그래도 신이 얼어 죽게 놔둘는지. 인공지능에 대항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라는 조언에, 인간이면 누구든지 간직할 진부하고도 지루한 기억 조각들을 모으고 모아, 은행나무 잎처럼 침대 삼아 누워보면 인공지능도 느껴보지 못할 포근함을 맛볼 수 있지 않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