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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지애문학

[지애문학] 시내버스 3100번, 일오구삼

입력 : 2020. 11. 23 | C10

 

 

높은 빌딩에서 바라본 강변북로로 향하는 길목의 네거리는 출근길로 분주하다. 8시 53분, 쉬면서 뭐라도 하기엔 애매한 시간에 도착해 스틱 커피를 타고 창가에서 출근하는 사람들을 지켜본다. 이제 도착하려는 직장인들과 환승하려는 사람들 사이의 러시아워 바라보는 모습이 미니어처 구경하던 꼬마 아이 같을 때가 많다.


몇 초 남지 않았을 패딩점퍼는 요리조리 사이를 스쳐가며 여유롭게 건너자 그 뒤로 성큼 걷는 백팩 배 뿔뚝 아저씨. 내 키보다 높은 하이힐과 유선 이어폰이 거슬려 찡그리는 듯 누가 봐도 직장인 아가씨, 답답해진 마스크로 헐떡이며 유랑하는 할아버지, 시루마냥 담아온 버스들이 줄지어 도착하고 네거리는 출근길 정점을 찍는다.


유독 관심을 기울인 건 매일 이 시간 이곳 네거리를 지나쳐 바삐 걸어가던 1593님. 입사하고부터 지켜봐온 그가 간발의 차로 버스를 놓친 건 처음이다. 게다가 갑작스레 내리우는 폭우에 절망하는 모습이 여기까지 선명했다. 힘차게 뚜벅뚜벅 힘내보자 소리치는 DJ가 중계하듯 문자들을 읽어 내려간다.


“1593님. 눈앞에서 버스를 놓쳤네요. 가을비도 쏟아지지만 오늘 하루 파이팅. 네, 1593님도 힘내시구요.”


저걸 어쩐다. 안 됐다고 한 마디 꺼낼 새 없이 일에 치이는 평일 아침 고달팠지만 선곡한 노래 가사 한 구절이 끊임없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정각. 평소보다 일찍 빠져 나왔다. 아래서 바라본 내 자리는 높아만 보였다. 멈춘 줄 알았던 가을비는 퇴근길에서도 갑자기 쏟아졌다. 기상관측 이래 113년 만이란다. 버스가 도착했다. 가을비도 피해야 한다고 뛰었지만 놓치고 말았다. 한 시간 더 기다려야 한다. 전광판은 혼잡 일뿐 여유란 글자는 1도 없었다. 어떡하나 발만 동동 구르며 손바닥으로나마 가렸지만 역부족.


내리던 비가 멈추자 폭우도 끝났다고 생각하다 누군가가 옆에서 손등 가려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1593님?”


“예? 그걸 어떻게…….”


“아침마다 라디오 듣거든요.”


아침마다 지켜봤단 얘길 하면 이상한 취급 받을까 황급히 라디오로 둘러댔다. 그래도 1593님인 줄 어떻게 알았는지 의아한 표정에 나도 모르게 질러버렸다.


“배…. 고프시죠? 같이 저녁이라도…….”


어색한 의미의 옅은 미소를 건네자 웃으며 답했다.


“이직한지 얼마 안 됐거든요. 아침부터 버스도 놓치고 우산도 깜빡하길 잘했네요.”


이어서 1593님이 이름을 물었다.


“네?”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싶어서요.”


“지애요. 유지애.”


귓가에 남은 그 노래가 가을비처럼 떠올랐다. 집에 도착해 놓쳤다던 그 버스가, 3100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작은 연못에서 시작된 길
바다로 바다로 갈 수 있음 좋겠네
어쩌면 그 험한 길에 지칠지 몰라
걸어도 걸어도 더딘 발걸음에
너 가는 길이 너무 지치고 힘들 때
말을 해줘 숨기지마 넌 혼자가 아니야
우리도 언젠가 흰수염고래처럼 헤엄쳐
두려움 없이 이 넓은 세상 살아 갈 수 있길
그런 사람이길
더 상처 받지마 이젠 울지마 웃어봐
너 가는 길이 너무 지치고 힘들 때
말을 해줘 숨기지마 넌 혼자가 아니야
우리도 언젠가 흰수염고래처럼 헤엄쳐
두려움 없이 이 넓은 세상 살아 갈 수 있길
그런 사람이길
너 가는 길이 너무 지치고 힘들 때
말을 해줘 숨기지마 넌 혼자가 아니야
우리도 언젠가 흰수염고래처럼 헤엄쳐
두려움 없이 이 넓은 세상 살아 갈 수 있길
그런 사람이길
그런 사람이길

 

YB, “흰수염고래”, 흰수염고래, 201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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