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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지애문학

[지애문학] 지하철 역사(驛舍)

입력 : 2021. 02. 10  21:16 | A29

 

 

후회라는 단어에서 시작한 것 같다. 내뱉지 말았어야 했던 말, 하지 않아도 되었을 행동. 같은 장면이 같은 말과 같은 행동으로 반복되어 패치워크 모양으로 덧대어져 모였다. 한데 모아 눈앞에서 뒤통수까지 둥그런 모양으로 가로막아 내딛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야 하지 말아야 했을 생각으로 알아차렸다. 불현듯 나타난 패턴이 반복과 반복으로 모아졌듯 되돌아온 하지 말았어야 했다던 입말들이 하나로 모아 심장을 건드려 올라가는 박동 속에 걸음을 멈추었다.


후회라는 단어가 곧 자책으로 연결되는 순간. 두 번째 국면을 맞는다. 뒤로부터 새까매진 그림자가 머리와 얼굴, 가슴에 이르러 덮었고 광장에 즐비한 간판이 내 앞으로 다가온다. 가루처럼 흩어지던 아스팔트 반사되던 네온사인 박동처럼 들뜨던 소리들이 먹먹함을 입으며 질주하는 터널로 뛰어간다. 맞아, 길다고 생각하던 터널도 밝아지고 어두워진 여러 번의 순간들을 지나쳐야 벗어나지. 그렇게 생각하고 표정 관리를 떠올렸다. 자각이 드는 걸 보면 아직은 세 번째 국면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여지없이 다가오는 어두움과 빛으로의 이동이 혼선을 만들며, 세 번째 국면을 맞는다. 두 눈은 반짝이던 랜턴처럼 아파오기 시작하고 조금씩 호흡이 불안해져 불규칙적 내뱉음이 빠르게 마셔야만 산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패치워크는 사라진지 오래다. 그을린 타오름도 잊었지만 지금, 여기가 강박처럼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어제의 일도 내일의 일도 찾을 수 없었다. 부끄러움, 추한 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짧아져간다. 가다듬을 새 없이 후들거린 다리가 어디라도 앉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보통은 세 번째 단계에 그쳤을 때에야 사라지건만 지금의 지나칠 터널은 중간인지 끝에 도달했는지 좀체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아서 끝나갈 지점을 추측하지 못한다. 멈추지 않고서 지나칠 수 없기에 입말의 흐름도 리듬처럼 하나 둘, 호흡의 흐름으로 바꾸어 나간다. 내쉬고, 마시고 잊어버린 터널 랜턴 고장 난 것처럼 시야에서 사라진다. 들고 있던 물을 마셨다. 고장 난 랜턴의 터널은 껌껌했다. 저 앞 출구가 보인다. 작은 원 조금씩 다가와 터널의 끝임을 말해준다. 네 번째가 오기도 전에 끝난다는 사실에 화색이 돋는다.


마음속에 잊었던 한 가지를 선언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그건…….’ 주문처럼 되뇌는 음성언어가 이미지로 텍스트화 되지 않도록 내 입말에 주의했다. 입을 벌어 그에서 야까지 멈추지 않고 터널에서 나올 때까지 주문으로 소환했다. 다가오지 않아도 괜찮을 그 이름 덧붙여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터널을 넘어서지 않기 전에는 선언을 싫어했다. 무속신앙 부적처럼 보이던 유감스런 빨간 글씨 쓰듯 효능 없는 농담으로 보였기에. 분위기를 고양하고 친근하게 다가가는 농담처럼 조크를 배우면서 터널에서 견뎌내는 방법으로 터득해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 터널뿐만이 아니었다. 조금씩 웃음도 들었지만 싸맨 머리에 떨군 나의 고개가 멀리서 지켜본 것 같지 않아 움직여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갈 길이 멀다는 생각도 지금은 중요치 않았다. 잠시만. 잠시만, 앉아서 눈 감아 완전히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했다. 처음 했던 그 단어가 잊혀진지 오래다. 다행이다. 떠올릴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생각에서 생각으로 단어가 단어들로 연결되는 느낌을 좋아한다. 서로가 끌어주고 부족함을 채워주는 그림으로 떠오르듯 그 단어에서 한 발자국 내딛었을 따름이다.


이따금 걷히는 안개에서 터널로 들어올 때면 놀라곤 한다. 피할 수 없어서 슬프지만 할 수 있는 건 생각뿐이다. 누군가 건드리는 순간을 느끼기 전까지 앉아 있었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