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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지애문학

[지애문학] 퇴근 길

입력 : 2021. 02. 24  21:10 | 디지털판

 

 

“저도 그 방면인데…. 타세요!”

괜시리 들킬까봐서 말 못하던 차 말할 때까지 기다린 꼴이었다. 바보 등신. 좀체 멀미가 낫지를 않으니 태워주는 아량도 무의미했다. 지금쯤 지하철 안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단어 외우고 있어야 할 시간. 몸은 편해져도 속 버리느냐 몸은 힘들어도 속 편하느냐. 하지만 이 남자 옆에서는 말짱했다. 이름 모를 적당한 향수. 운전대에 올려둔 손목의 시계. 힐끔 쳐다볼 때마다 반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턱선. 차체의 흔들림 하나 없는 고요한 분위기가 좋았다. 이 남자에게 풍기는 색다른 느낌이 만날 때마다 좋아하게 만들었다.

“자유의새노래 제1라디오 7시 뉴습니다. 살인 및 사체유기 등 혐의로 구속기소 된 김지수 씨 공판에서 재판부가 사형을 선고하자…….”

이 남자는 정신없이 일에 치이다 퇴근할 무렵 귀에 꼽은 이어폰에서 울리는 고요한 노래 같다. 자기 할 일에 열심히 살아가면 생기는 느낌일까. 하루 종일 졸지 않고 피곤함 없는, 오히려 퇴근길에서야 머리가 맑아지는 그런 느낌. 마스크 없이도 숨 쉴 수 있는 믿을만한 그런 사람.

“제 어떤 부분이 좋으세요?”

“… 네? 숲 같아서 좋아요.”

아, 그러시구나. 하하. 그렇죠.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한 아이니까요. 라고 말하는 순간 ‘제’가 실은 ‘쟤’였다는 걸 뒤늦게 알아먹었다. 이 바보.

“진유 씨네 논설위원하고 밥 먹었어요. 겉으론 치고받는 것 같아 보여도 따로 만나거든 곧 친해요. 오늘 사설도 기막히던데요?”

기막혀서 할 말이 없다. 동시에 말한 사설 제목. 같은 소속사 멤버를 잔혹하게 살해하고도 죽일만해서 죽였다고 말하다니. 그런 악마를 변호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지 물은 논설위원의 글. 차장이 갑자기 빼고 넣으라는 이 사설 때문에 퇴근도 늦어졌다. 한때 좋아했던 가수인데, 하루아침에 악마가 되고 살인자가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매일 지하철 타고 걸어서 출퇴근하면 힘들지 않으세요?”

“힘들기야 하죠. 그치만 지하철에서 읽는 소설 무지 좋아해요. 버스는 흔들림이 커서 읽지도 못하는 걸요.”

숲 같다던 말, 사실 당신에게 어울리는 칭찬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모두에게 미움 받는 악마조차도 마음껏 숨 쉴 수 있게 만드는 숲. 언제든 찾아와 머물고 지나가도 불평 한 마디 않는 편안한 숲. 가끔 찾아와도 서운한 티 드러내지 않는 안아줄 숲. 소설과 논문, 단독 기사로 죽어버린 연애세포가 살아난다.

“근데 찢어버렸어요. 지수가….”

잠시간 우리의 대화는 끊어졌다. 가로로 한 번 세로로 한 번 찢어진 상고장 앞에서 애써 웃으려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신호에 멈추자 노을을 바라본다. 들이 마신다.

“어른들은 늘 만들어준 길대로 살아가면 편할 거라고들 하죠. 그 길 벗어나려던 피해자가 원망스러웠을 겁니다. 매일 꿈에 찾아와 망치를 들고서 가슴을 내리칠 때면 ‘미안해’ 한 마디에 멈추고서 사라지는 원혼. 정신과 진료로 밀고 들어가자고 해도 듣질 않아요. 이런 고민도 사치라고.”

플레이리스트에서 완전하게 사라진 김지수…. 아니 악마의 이름은 내게도 당연했다. 창 밖 바라보던 노을이 어쩌면 머잖은 마지막 하늘이란 생각에 먹먹했지만 상관없었다. 나와 먼 거리에서 숨 쉬고 있을 뿐이니까. 그런 악마에게도 안아줄 숲이란 게 대단해 보였다.

더는 악마 만날 기회조차 사라진 당신이 마지막 발갛게 물드는 노을을 바라보자 신호가 바뀌었다. 조용히 움직이는 차 안 라디오에선 단신이 끝나 있었고 노래 하나가 먹먹한 분위기를 전환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