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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사설

[사설] 보랏빛 저무는 순복음 시대

 

오중복음·삼중축복과 순복음 신앙을 세계에 알린 영산(靈山)  조용기 원로목사가 서거했다.(2021.09.14) 80만 교인 수를 상징하던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조 목사의 순복음 신앙으로 태동했다. 번영신학(繁榮神學)으로도 알려진 순복음 신학은 ▲중생의 복음과 ▲성령충만의 복음 ▲신유의 복음 ▲축복의 복음 ▲재림의 복음으로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며 ▲강건한 삶을 추구하는 삼중축복과 결을 함께한다. 아담과 이브의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음으로써 타락으로 변질된 인간을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성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축복 받는다는 가르침이 핵심이다.


세계 선교에 앞장 선 조 목사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71개국에서 370여 차례 부흥회를 인도했다. 성령충만을 강조함으로써 내주(內住)하는 성령 신학인 인격적 성령론을 가르쳤고, 이는 교회 생활과 연결되어 한국교회 부흥을 이끄는 토대가 되었다. 조 목사의 가르침은 여의도 순복음교회 독자적 성가인 복음성가와 함께 한국교회로 이식되었다. 드럼과 박수가 금기시 되었던 한국교회 풍토 속에서 당당하게 밴드형 찬양팀을 결성할 문화적 유행을 불러 일으켰고, 현재 2020년대를 살아가는 한국교회에 즐거운 찬송이 없는 교회가 없을 정도로 순복음 신학이 강조한 성령충만의 가르침이 일상적 신앙의 기초로 자리 잡았다. 조 목사는 교회 당회장(담임목사) 직을 물러나서도 영산조용기자선재단 이사장을 맡으며 복지 증진에 앞장섰다. ‘대통령 표창적십자헌혈유공자 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은 조 목사는 사회 복음 뿐만 아니라 복지 증진에도 힘을 썼다. 비정부기구(NGO) 사단법인 선한사람들(지금의 굿피플)을 세웠고 당회장에서 물러난 후에도 영산조용기자선재단을 통해 취약계층을 돕기도 했으며 평양에는 심장병원을 세우는 일에 앞장섰으나 남북관계 문제로 인해 끝내 빛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성경에서 사람의 죽음이 한 번의 일이라고 정의하듯(히브 9,27) 모든 사람에게는 흑과 백이 있기 마련이다. 한국교회에서 조용기 목사만큼 흑과 백 콘트라스트(contrast)가 강렬한 인물도 없을 것이다. 자선 사업과 복음 전파에 힘을 써 왔지만 순복음 신앙을 번영신학이라고도 이름 부르는 것처럼 그의 신학에도 우민화(愚民化)라는 한계를 부정하기 어렵다. 삼중축복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전통적인 기독교 내러티브와 합하여 동시에 성령의 내주로써 교회 생활과 더불어 이뤄지는 밝은 면도 있다. 교회 생활과 조용기 목사 자신의 가르침 너머 성서를 알고 스스로가 독해 가능한 자생적(自生的) 신앙인으로 성장해야 함에도 카리스마 목회 리더십에 압도되어 성숙 기회를 놓친 어두운 면도 명백하다. 끊임없이 사유하는 자전거 신앙으로 꽃봉오리를 피워야 할 한국교회의 신앙과 신학에 감성에 치우친 목사 우상화와 목사 중심의 성서 해석이 한국교회에 영향을 미쳤다. 신학교에서 조차 한국교회는 조용기와 함께 부흥했다가 조용기와 함께 사그라든다는 말이 돌 정도로 영향력은 막대했다.


교회 내 당회 장로들과 갈등을 빚은 조 목사는 2011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됐고 2017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은 바 있다. 2009년 새벽 예배 도중 무릎을 꿇으며 자신의 아들 문제로 인해 사과를 하기도 했다. 문제는 조 목사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가족을 둘러싸고 교회를 사유화하려는 문제가 드러나 논란이 일면서 교회 내에선 ‘만일 90년대까지 목회했더라면 평가가 달라졌을 것’이란 후문이 돌았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이라는 순복음 신학은 조용기 목사 자신의 삶을 통해 명백한 콘트라스트 속에서 증명된 것이다. 번영과 복음은 함께 할 수 없으며 동시에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신앙은 군사 독재 권위주의 시대 속에서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내보였다. 유쾌함과 삶의 통찰로 일평생 설교하며 살아온 조용기의 시대를 이제는 신학자들이 평가하게 될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유행으로 한국교회도 비대면 예배 시대를 맞이했다. 목회데이터연구소에 따르면 한국인의 종교별 호감도 중 개신교는 4위를 차지했다. 불교, 천주교, 원불교, 다음으로 개신교회를 택한 것이다.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이 달라졌다. 전국을 넘어서 전 세계가 감염병으로 위기에 빠진 상황임에도 대면예배를 고수하는 교회들로 인해 여론이 악화된 것이다. 교인 우민화에 조 목사의 영향을 부정하기 어렵다. 서거를 맞이한 한국교회 어느 단체도 조 목사의 어두움은 조명하지 않았고 밝은 면만을 기억하고 말았다. 심지어 조 목사 죽음조차 기리지 않은 연합 기구도 존재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한국교회에는 내세울 만한 어른이 없다는 점이다. 통합된 의견, 자성(自省), 성숙의 기회를 마련해야 할 어른이 부재한다.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며 1980년대에 멈춘 교회를 바라보면 서글프다. 코로나 감염에도 아랑곳 않은 채 시위에 나서는 이들에 대해 쓴소리 할 만한 어른이 없다. 개신교회에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돌아가자는 감정만이 남아 있다.


10년 전 여의도 순복음교회에는 주일 2부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수 시간 전에 가야 한다는 소리 소문이 떠돌았다. 앉을 좌석이 없어 부속성전 빼곡하게 교인들이 모였고, 돗자리를 펴 바닥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조용기 목사의 목소리를 듣기도 했다. 베다니 광장에도 조용기 목사의 설교가 들려오던 시절이 있었다. 노쇠한 노인이 되어 힘없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복음성가 1장을 부르던 조 목사의 모습을 보며 울컥하는 교인 앞에서 한국교회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그때는 좋았었지’ ‘만 명이라도 모였지코로나 이전 여의도 순복음교회 주일4부예배에 참석한 교인은 과거와 같지 않았다. 10년 새 수평이동으로 옮겨간 교인들이 무엇 때문에 순복음 신학을 등졌겠는가.


마지막 한 세대, 영산 조용기 목사의 서거를 맞이하며 한국교회는 저무는 보랏빛 당신들의 화려했던 기억도 하나 둘 잊히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은 한 때의 영광을 금세 잊는다. 냄비민족이기 때문이 아니다. 한 때 유행을 가슴에 새기지 않으며, 한 명의 역사를 마음으로 기억하듯. 조용기 목사와 순복음 신학이 한국사에 영향을 끼칠만한 가르침이자 인물이었는지를 되물어야 한다. 영산의 흑과 백을 또렷하게 볼 수 있는 자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