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우[now]

[주마등] 달달한 편의점 모찌롤 케 ― 잌

 

 

편의점 구석 한 편. 의자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잠은 푹 자둔 상태다. 사장님은 이것저것 지시사항 가리키고서는 퇴근했다. 그렇듯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로 응축된다.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 신문이나 책 읽다가 심심하면 글 좀 쓰면 된다. 자정까진 손님만 스무 명 남짓. 피곤함만 빼면 꽤 괜찮다. 벽면 화이트보드엔 ‘해야 할 일’이 빼곡했다. 그닥 복잡하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에 청소, 선입선출. 물류도 없어서 청소 때만 바짝 일하면 된다.

종이컵에 믹스 커피 따르고 자리에 앉았다. 편의점 조끼에 배인 내 체취가 비 냄새에 가려졌다. 비 냄새라. 다소간에 불편해질 것 같다. 박스는 사장님이 준비해두셨을 테고. 발자국이 묻기 전에 깔아두면 될 텐데. 움직이기는 귀찮고. 어제는 몇 명쯤 왔을까. 뇌가 피곤한 모양이다. 멍 때렸다. 머 ― 엉.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렸다. 시 소속 청소차. 집에서 밤새 유튜브 보다가 듣던 낯익은 소리다. 갓길에 멈춘 차에서 두 사람이 나왔다. 한 분은 20대 초반 다른 분은 50대 중년. 시원한 음료를 사다가 바깥 원목 테이블에서 마시던 광경을 CCTV로 지켜보았다.

아버지와 사춘기 아들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투입된 지 얼마 안 된 어색한 사이로도 보였다. 무엇을 생각했을까. 조용히 담배를 비우다 유유히 사라졌다. 그 짧은 시간의 빗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침묵은 오래지 않았다. 투덜투덜 바닥에다 박스를 깔아두고 테이핑했다. 잠깐 내리고 그칠 비 같아 하나만 깔아뒀다. 오늘도 손놈을 피할 수 없었다. 다짜고짜 화장실 쓸 수 있냐, 핸드폰 충전은 안 되냐, 담배 찾아 헤맬 때마다 신경질 부리는 인간들을 마주하려니 빗소리가 귓가에서 사라졌다. 그러다 앞으로 모찌롤이라 부를 이상한 손님을 만났다.

 


2019년 5월 2일 목요일
택시에서 내리는 듯 둔탁한 소리가 스쳤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왔다. 육감에 집중했다. 곧 출몰하겠구나. 곧 들어오겠지, 들어오겠지. 귀는 출입문 앞에 서 있었고 눈은 책의 마지막 문단에 머무르고. 격정적 목소리가 연이었다. 귀찮아지겠네. 들어오지 마라. 들어오지 마라. 제발. 마음으로 기도했다. 잠잠해지자 근처 주민이겠거니 의자에 앉으려던 순간. 출입문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찹쌀떡과 마주친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깜짝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째려만 보았다. 통화 중이었다.

“아, 씨발, 지금 편의점. 응, 응…….”

하나의 손놈이 편의점을 배회하고 있다. 누가 봐도 술 취한 20대 여성이. 그대로 서서 남은 단락을 마저 읽었다. 한 바퀴를 돌았어도 사려던 물품이 안 보였는지 다시 한 바퀴 도는 듯했다. 돌다보면 심심해지니까 브로드웨이 삼아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책을 덮고 감시체제에 돌입했다. 권태기 남자친구 얘기인 모양이다. 짜증인지 분노인지 하여튼 남친하고 싸운 모양이다. 사려는 것도 아니고, 안 사려는 것도 아니고. 애매한 빗줄기 같은 것. 저절로 회개 기도가 나왔다. 지난 날 선배와 통화하며 매대 곳곳을 배회한 잘못을 용서해 주세요. 다음부터 그러지 않을 테니 이 귀찮은 손놈이 빨리 나가게 해주세요.

손놈은 통화를 마치자 물건을 포스기 앞에 쏟아냈다. 젤리 사탕, 숙취 음료, 그리고 모찌롤. 자정만 지나면 내 건데. 입꾹닫 바코드를 찍어댔다.

 


“담아주세요.”

단골은 눈 감아 달라고? 어림도 없다. 단골도 아닐 텐데. 봉투 버튼을 누르자 손놈이 말했다.

“어, 곧 폐기였네요?”

그걸 이제 알았냐.

“어느 학교 다니세요?”


“좋은 학교 다니는데요.”

“전공은요?”


“소비자심리학과요.”

대충 둘러댄 말을 믿는 둥 마는 둥.

“계속 물어보면 귀찮아할 거죠?”

“네.”

“그냥 가는 게 더 낫죠?”

“네.”

말없이 나가자 벙 쪘다. 내가 좀 심했나. 하여 모찌롤이라 부르기로 했다.

 

 

2019년 6월 2일 일요일
편의점에는 연속성을 가진 손님이 있고, 불연속성 가진 손님이 있다. 어차피 손놈이라 부르는 진상은 둘 다 포함된다. 그나마 스트레스 덜한 부류는 불연속 놈들이다. 자주 오지 않으면 그러려니 잊어버리면 그만이지만 이따금 찾아 올 불청객은 생각만 해도 짜증이다.

“어이!”

50대 중년 손님이 오른손 살짝 들어 인사했다. 손님이 맥주 고르는 사이 안주 거리를 챙겨드렸다. 1+1 제대로 들어와 있었다. 손님은 심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카드를 건넸다. 1+1 혜택 3트 만에 성공. 사장님에게 두 차례나 말씀드리자 챙겨주신 모양이다. 이런 손님은 활기차고 오래 머무르지 않으며 진상도 아닌 단골손님이라 반가울 따름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을 경험했다. 두꺼운 정장에 다소곳한 할아버지. 막걸리 하나만 사주면 안 되겠느냐던 부탁을 단칼에 거부했다. 우는 시늉에 나가달라니까 다시는 보질 못했다. 아침 교대 전, 다짜고짜 찾아와 “죽을 거”라고 “나 말리지 말라”던 노인의 경우도 막걸리 할아버리처럼 단회적인 특징의 불연속성 손님이다.

화장실 부탁하는 사람들도 한 번은 요구해도 두 번은 부탁하지 않는다. “그럼 알바님은 어디서 볼일 보냐”는 말에 5층 주인집에서 해결한다는 거짓말도 배운 대로 써먹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사람 대하는 일이 힘들거나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매일 보는 사람들도 아니고, 대개 이 동네 단골은 진상 짓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찌롤도 그런 불연속 손놈으로만 생각해왔다.

그렇게 잊어버렸을 즈음.

“크하하! 디질래!”

또 왔다. 대놓고 ‘나 취했소’ 차림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인사를 대충 받았다. 매장 몇 바퀴 돌고 돌아 술 취한 척 물건을 고르는 모습을 조용히 관찰했다. 거기에 “왜 연락 안 받았냐”고 소리치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애초에 날 괴롭히러 들어온 게 아닐까. 방어적 태도로 신속하게 계산하려 했다. 어김없이 모찌롤 사가는 모습에 입맛만 다셨다.

한 숨이 나왔다. 카드 한 장이면 될 계산에 굳이, 굳이 만원짜리 꺼내어 현금 결제해 달라는 것이다.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스름돈을 드리려던 차.

“가방에 넣어주세요.”

손으로 받으시라고 말씀 드렸지만 계속 가방에 넣어달라고 요구해 포기하고 말았다. 50대 아저씨 마냥 심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고만 있었다. 말을 걸 것 같아 창고로 들어가려고 했다. 청소하려는 줄 알고 돌아간 모찌롤을 보며 마음으로 ‘나의 승리!’를 외쳤다. 창고에 다녀오자 아니나 다를까 문은 벌컥 열려 있었고 모기도 잔뜩 들어오고 말았다. 다음 손님을 위해 계산대로 향하니 소세지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2019년 7월 4일 목요일
근무 세 달 차. 책 읽으며 CCTV에서 알짱거리는 사람이 매장에 들어올지 않을지 알아맞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처음엔 염색한 노랑머리에 누군지 몰랐다. 다른 사람인가 싶을 무렵 출입문에서 꽈당 부딪친 찹쌀떡에 모찌롤을 발견했다. 책을 내려다 놓았다.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성큼성큼. 오늘도 매장 곳곳 돌아다닌다. 젤리 매대 앞 앉았는지 꿇었는지 의문의 자세를 취하다 하나 쥐고서 과자 매대 둘러보는 느낌이 들었다. 대놓고 CCTV로 감시할 순 없으니 슬쩍 보면서 어디서 뭘 하는지 지켜봤다. 혹시 토라도 하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했다.

얼굴 만한 가방 올려놓고 머리카락 뒤로 쓸었다. 취한 얼굴 안 그래도 벌겋게 달아오른지 오래다. “나 취했어요?” “나 취해보이져?” “맨날 취할 때만 들어오는 것 같죠?” 모두 “네”라고 답했다. “왜 그럴 때마다 오느냐”고 물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갑자기 가위 빌려달라는 말에 연필꽂이의 작은 가위 대신 가위라는 상품이 어디에 있는지 정중하게 답변 드렸다. 모찌롤이 입술을 굳게 닫자 웃음을 참으며 연필꽂이에서 작은 가위를 가져왔다. 모찌롤 답지 않게 공손히 인사하자 가슴이 뛰었다.

모찌롤은 희미해진 눈동자로 힛 웃었다. 어눌한 단어를 조합하며 가위의 용도를 설명했다. 철썩 주저앉아 샌들을 벗고 가위로 자르려 하자 다가가 만류했다.

“자르시려구요?”

샌들의 불편한 부분을 자르겠단다. 핑크빛 물든 발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지금 이거 다 찍히죠?”

“네. 가끔 보는 것 같으세요.”

모찌롤이 베베 웃는다. 나도 웃었다. 편의점을 매일 방문한다고 한다. 기억나는 게 없었다. 그래봤자 저번에 한 번 비슷한 분을 본 기억뿐이다.

“매일 와도 모르실 거예요. 생얼 차림으로 아무도 모르게 오니까요.”

어색한 공기가 감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찌롤은 가위의 뾰족한 부분이 내 손에 닿게 건넸다. 공손한 손짓에 또 한 번 심쿵했다. 가위를 있던 곳에 꽂아 두었다. 모찌롤은 손까지 흔들며 인사했다. 어디서 본 얼굴. 그러나 아무 대꾸도 않는 모습. 그분이었을까.

 

 

매장서 읽어 내려간
서양철학사 페이지
천 페이지가 넘는다
중세 시대에 이르자
그간의 정독 멈추고
말없는 초여름 공기
그 별명 읊조리게 해

 


2019년 7월 16일 화요일
의자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자 여유를 느꼈다.

 


2019년 7월 26일 금요일
새벽 다섯 시가 넘은 시각. 비가 무지 내린다. 저 건물 너머 번쩍이자 창가 가장자리에 택시가 멈춰 섰다. 혹시나 하고 누가 내리나 지켜봤다. 익숙한 얼굴이 매장으로 달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얼른 서둘러 튀김 쇼케이스 뒤에 숨어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모찌롤은 문을 벌컥 열고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곧장 음료수 쪽으로 향했다. 통화 중이었다. 한참을 고르고 고르다 끝내 빵과 음료수를 가져온 모찌롤이 말했다.

“맨날 취한 채로 들어오네요. 흐흐.”

계산을 마치자.

“빨대 꼽아주세요!”

친절하게 빨대에 꼽아 음료수를 건네 드렸다. 밖은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우산 없는 모찌롤은 집에 돌아가기 어려워 선지 자리에서 빵 먹어도 되느냐고 물었다. 여전히 통화 중이었다. “여기가 어디죠? 뭐라고 불러요?”라고 묻자 “편의점이요”라고 답했다. “여기가 어디 편의점인데요?” “씨유(CU)예요, 씨유”라고 대답했다. 여기가 진짜 씨유 편의점인줄 믿은 모찌롤이 친구에게도 알바생한테 겁나 뭐라 뭐라 시키는 중이라고 자랑했다.

통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며 글을 썼다. 이것저것 떠드는 소리가 끝나자 침묵이 이어졌다. 힐끔힐끔 모찌롤을 쳐다봤다. 편의점 광고 음악 두어 곡이 끝나갈 무렵. 모찌롤이 계산대를 빤히 바라보다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명령을 내렸다. 지가 먹다 남긴 빵 한 조각 주면서 버려달라고 말한 것이다. 어이가 없어서 침 안 묻은 쪽으로 잡으려 했다. 그 순간 내 왼손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이게 무슨 상황일지 싶어서 눈썹을 살짝 내려 물었다. 모찌롤은 아무 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손에서 온기가 느껴지기까지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손을 떼 휴지통에 버렸다.

당황한 나머지 친절히 문까지 열어서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 드렸다. 야외테이블에서 친구일지 지인일지 끊어진 통화가 이어졌다.

가끔은 해 뜨는 노을을 등진 채 하늘을 찍곤 한다. 비가 그친 날이면 하늘도 드라마틱하게 보인다. 청소를 마치고 찍으려다 빈 야외테이블을 보았다. 모찌롤은 보이지 않았다.

우산이라도 챙겨드릴 걸 생각 다 못다 한 즈음 손놈이 찾아왔다. 4만 8천원 슬림 골드 살 거라면서 동전을 쏟아놓은 광경에 헛웃음이 났다. 하 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