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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now]

[주마등] ‘새로운 천사님이 선물과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박살난 시계의 죽음
멈춰버린 나의 시간
지친 마음 엎드려서
말없이 눈물 흘리다
찾아온 새로운 천사

 

예정된 반항이 아니었듯 박살난 시계의 죽음도 예정에 없었다. 초침은 멈추었고 나의 시간도 밤 10시 22분을 넘어서지 못했다. 갈아입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 아침을 맞이해도 불편한 마음은 여전했다. 서너 번 깨어서도 기분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쯤이면 풀릴 듯한 감정에서 격한 분노에 이르기까지 수차례 파도를 겪어야 했다.

이를 악 물었다.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책임은 오로지 나에게 돌아올 뿐이다. 게으름을 피웠으니까.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으니까. 못난 인성을 가졌으므로. 노력하지 않은 죄로. 절망의 숲 사이로 간간히 비치는 햇살에 짜증이 났다. 청명한 하늘은 차라리 죽었으면 좋았을 내 마음을 조금도 알아봐주지 않았다. 계획은 완벽히 틀어졌다. 도대체 왜.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걸까.

고갤 돌려 박살난 자명종만 쳐다봤다. 흐를 눈물도 이제는 없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

카톡이 물었다.

“모해 모해.”

누워 있잖아.

‘새로운 천사님이 선물과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눈이 동그래졌다. 배꼽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누구지. 누굴까. 모르는 사람. 뭐지. 뭘까.

죽고 싶어도 떡볶이는 먹고 싶은 법이다. 생크림 케이크가 아른거렸다. 한 입 가득 묻어도 무죄일 텐데.

‘누구세요’

‘안녕 보라 씨’

농담 같은 가벼움. 왜 이런 장난을.

‘어제 큰일 났었다면서요. 태풍이 지나간 자리는 잠잠해지는 법. 받아요. 대가는 없으니.’

이상한 사람.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거 받지 말랬는데.

‘절 아세요?’

‘네’

불명의 사람은 내 모든 사소한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처음 귀 뚫은 날, 나만의 그림체, 가장 좋아하는 노래부터 인스타 비공개 계정까지. 가본지 얼마 안 된 데이트 코스, 하다못해 나도 모르는 자명종 가격까지 디테일한 대답에 조금씩 무서워졌다.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발등에 그림 맞춰봐요’

‘용?’

‘차단’

‘별 두 개. 우주를 좋아해서 신성과 항성을 담은 건데 타투이스트가 별을 잘 몰라서 그냥저냥 별이 됐다는 학계의 정설이….’

김지수?

새로운 천사는 한 가지 약속을 꺼내들었다.

‘보라 씨는 지금 케이크가 당긴다는데요? 1일 여행. 계좌엔 두둑이 채워뒀으니 오늘은 보라 씨가 마음 가는대로 떠나보세요. 여행의 끝에서 제 정체를 공개하죠.’ 

살짝 고민됐다. 허나 배부터 채우지 않으면 진짜 굶어 죽을 것 같았다. 어차피 늦어버린 거 휴강이나 때리자. 아무도 없는 거실을 지나쳐 씻기로 했다. 새로운 천사는 가장 좋아하는 옷을 입으라고 말했다. 그치만 흰 박스 티에 청바지 하나, 캡모자만 달랑 쓰고 집을 나섰다.



‘버스를 타세요.’

투썸에서 생크림 케이크를 떠먹고 나왔다. 뜨거운 햇살이 사람들의 시선만큼이나 따가웠다. 점심시간 가로수는 한여름 그 자체였다.

오늘만큼은 최대한 건물 안에서 지내고 싶었다. 어차피 인스타만 할 거라면 밖을 나오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버스는 아무거나 타도 되려나.

정류장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줄 지었다. 시간표는 좁쌀만한 텍스트라 보일 리 없었다. 버스는 줄 선 쪽이 아닌 내 앞에 섰다. 아무 거라도 좋으니 도착한 버스라면 일단 타기 바빴다. 쿨하게 손잡이를 잡자 실랑이가 들려왔다. 청각 잃은 할머니가 목적지를 계속 묻고 있었다. 기사님도 지쳤는지 그냥 타라는 제스쳐를 보였다. 운 좋게 방향이 맞는 모양이었다. 불편한 몸으로 보자기와 힘겹게 오르려는데 버스 안의 젊은 사람은 나뿐이란 걸 깨달았다. 얼굴이 빨개졌다. 할머니의 보자기를 건네받았다. “고마우이.” 할머니 주름살이 낯설었다.

타이어는 늘 타던 방향의 반대로 나를 이끌었다. 꼭 어디서 내려야 한다는 인식 때문인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구경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기타를 매고 있는 여학생, 무거운 보따리 들고 시장까지 가는 듯한 할머니, 말없이 창밖 바라보는 아저씨,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내 또래 젊은이. 지하차도를 진입하던 버스 창문에는 내 모습이 비쳐 있었다. 누구보다 어둡고, 슬프고, 단단하지 못한 내가 보였다. 지하를 벗어난 차창 밖에는 철쭉이 피어 있었다. 핑크빛 물결을 멍하니 쳐다보다 어느새 빈자리가 났다. 에어컨 쌩쌩하게 틀어주는 버스에서의 여행이라니.

에어팟과 한 시간 버스 여행을 즐기다 천사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잘했어요. 담원역에서 내리세요.”

동네를 오르며 리어카를 붙잡은 할아버지가 보였다. 초등학생 몇몇 아이들이 언덕에 멈춰선 리어카를 힘겹게 밀어내고 있었다. 하수구에 빠진 모양이다. 거들었다.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올려주듯 밀어 위기에서 벗어났다. 키 큰 누나 짱! 칭찬 한 마디에 기분이 좋아졌다. 내친김에 언덕 위까지 함께 밀었다. 할아버지도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목적을 달성한 아이들과 나는 뿔불이 흩어졌다.

저 애들도 처음 본 사이구나.

구름으로 흐려졌다. 비가 올 것 같지는 않다. 떠돌아다니며 손바닥 부채질로 연명하는 내 신세야. 골목길에서 또 한 번 미소를 지었다. 아장아장 내걷는 아이를 뒤에서 좋아라 해주는 할머니들을 본 것이다. 다세대주택으로 얽혀 작은 마을처럼 보였다. 언젠가 죽으려고 자살을 검색해 보았다. 10대에서 30대까지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었다. 나 하나 죽는다고 바닷물 피바다가 될 것 같지 않았다. 하루 정돈 살아보자 마음먹고 다음 날 지수와 혜인이 앞에서 자살이란 단어는 말끔하게 지워졌다.

‘시장쪽으로.’

천사는 서점이 아니라 시장으로 나를 불렀다. 시장은 딱히 볼 게 없었다. 닭강정 사먹으며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빈 공간엔 어떤 점포로 채워질지를 상상했다. 카드 안 받는다고 생색내는 주인 할머니에게 화내던 아줌마도 지나쳤다. 바구니에 담긴 두부를 보니 엄마가 끓여준 된장찌개가 생각났다. 슬슬 미안하다 해야 할 지 뻐팅겨야 할지 고민됐다.

대학 입시와 남친과의 싸움. 부모님과의 갈등은 그저 현상일 뿐이다. 진짜 문제는 멈춰버린 시간 속에 몸만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나였다. 언제부턴가 스텝이 꼬이고 그저 과거만 탓하면서 살아가는 나. 며칠 째 무기력했다. 마치 잘못 살아왔다는 느낌에 두렵기까지 했다. 과거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싶었다. 어느새 다 잘 되고 있다는 주문을 걸고 있었다. 과거를 바라보는 엇박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과거를 회피하며 단지 내일을 아슬아슬하게 내걷는 내 모습이 보였다.

‘지도: 서울 종로구 창경궁로 88(예지동 6-1) 파울 클레’

천사는 지도로 목적지를 알려주었다. 광활한 시장통 이리저리 움직이려 했지만 천사가 알려준 곳이 보이지 않았다. 목적지 ‘파울 클레’ 여긴 어딜까. 카페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시장 건물 곳곳 돌아다니다 다세대 주택으로 보이는 옥상옥 시설과 지하 유흥주점까지 샅샅이 둘러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검색해 보았다. 파울 클레. 스위스 화가. 표현주의, 입체파, 초현실주의…. 생각보다 가까운 바로 내 앞의 파울 클레, Paul Klee. 알파벳 낡은 간판이 보였다.

깨림칙한 분위기의 파울 클레는 시계방이었다. 주인은 말없이 손목시계를 고칠 뿐 바빠서 아무 말도 없었다. 저분이 새로운 천사?라 하기엔 너무 늙은 아저씨다. 다양한 종류의 시계가 전시된 이곳에서 메시지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시계가 정말 많았다. 전자시계부터 아날로그시계도 있었고, 손목시계와 벽걸이 시계, 나무로 된 시계, 플라스틱 시계, 깨져서 고치려고 놔둔 시계, 그리고 자명종까지.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시간을 살고 있지.”

안경을 고쳐 쓴 주인아저씨가 무거운 이야기를 꺼냈다. 다시 보니 모든 시계는 현재 시간이 아닌, 저마다의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일부로 바꿔둔 걸까, 시차에 따라 둔 걸까.

“살아가는 장소에 따라서 시각도 다르고 목적에 따라서 달리 가리키기도 하고.”

다 고쳤는지 시계를 제자리에 둔 주인이 나를 보자 입술을 세게 닫고 살짝 미소 지었다.

“천사라고 아세요?”

“알고 말고. 자네 친구잖은가.”

친구? 난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인데.

“놓고 간 물건 자네에게 건네 달라고 부탁했다네.”

허리 숙여 꺼내 온 시계는 어제 저녁 박살 난 자명종과 똑같은 시계였다. 건전지를 넣어두지 않아선지 멈춘 상태였다.

“혁명은 시간을 멈추게 한다네. 박살난 시계탑처럼 더는 인류를 진보하게 두지 않는다고. 과거를 외면하고 과거를 짓밟아 미래를 만든다 한들 아픔이 매듭지어지겠나.”

무슨 얘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시간은 말없이 과거와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달려가는 것 같지만. 자네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천사의 시간도 멈추어 있어.”

무슨 소리야. 카톡을 보냈다. 당신 누구냐고. 아무 응답이 없었다. 잠적인가. 아님 이 아저씨가 그 천사인가. 내 시간이 멈췄다고? 뭐지. 무슨 말이지.

“허허, 정지된 시간은 자네만이 움직이게 할 수 있지. 건전지는 알아서 끼우게나.”

자명종을 받아들고 시장 건물 밖을 나섰다. 곧장 통화하기를 눌렀다. 땡땡땡 울리는 신호음에도 닿을 수 없었다. 두 번 세 번, 시장을 나오는 동안 연결을 시도했고, 출입구에 다다라서야 여성으로 추정되는 천사가 내 연락을 받았다.

“누구야. 말해줘. 제발.”

“새로운 천사….”

“장난치지 말고!”

하교 중인 지수와 혜인이가 손 흔들며 내게로 달려오자 천사가 대답했고 왼손에 든 자명종 초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0년 후의 너, 김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