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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서

첫 생리, 소녀는 시술을 결심했다:『창밖의 아이들』

 

창밖의 아이들
이선주 지음 | 문학동네 | 196쪽 | 1만2000원

 

주인공 유란을 보면서 이제 곧 여고생이 될 열여섯 소녀가 아니라 서른 살도 훌쩍 넘은 작가 이선주가 보였다. 나쁘게 말해서 서른 넘은 여성이 교복을 입고 인생은 이렇다더라 미소 짓고 있었다. “내가 본 그것들을 정직하게 쓰고 싶었다던 작가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그래서 소개글에 나온 것처럼 영구임대아파트 주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경험을 청소년 주인공 소설보다 지금 자신의 에세이나 소설로 써봤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았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땐 ! 훌륭한 문장력, 대단한데?‘하고 놀랐지만 두 번째 읽었을 땐 처음 읽었을 때보단 별로네생각했고 세 번째 땐 문장력은 훌륭한데 왜 감동이 식어 버렸는지를 깨달았다. 문장력은 훌륭하다. 배치도 어색한 게 없었다. 할머니와 콩이(김아름)와 대조적 묘사(1564문단), 낙원동에 있는 행운아파트와 토원동에 있는 엔 캐슬의 비교, 산부인과 대기실에서 기쁜 사람과 슬픈 사람이 명확하게 나뉜다는 사실(112,1), 밉지만은 않은 아줌마(59,3; 190,5), ’임신이란 무서운 거구나를 깨닫게 만드는 한국의 비참한 시스템에도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준 본문에서 박수를 쳤다. 이선주, 당신 삶을 물어보고 싶은 시선을 지닌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장점을 거둬버린 건 본문 후반부에서 무리수에 가까운 주인공의 변화다.

 

다음의 변화는 학창시절 한 번 내지 많아 봐야 두 번, 아니 깨닫지조차 못하는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1) 임신 불가능하도록 시술을 생각했다가 접어버림.(183,6)

2) 세상은 돈의 가치만으론 살아갈 수 없으며 가족의 가치도 소중하다고 깨달음.(185,5)

3) 나이 마흔이 넘도록 집에서 텔레비전만 보던 아버지를 대신해 청주댁 아주머니를 제3의 시선에서 바라봄.(166,3)

4) 가난한 사람들은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들인 게 아니라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란 점.(182,2)

5) 친구 오예솔은 겉으로 볼 땐 당차지만 마음속으론 한없이 여린 아이가 살고 있음(180,13)

 

이제 막 고등학교에 진학할 아이가 깨닫기에는 가짓수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반 집구석 원망하며 내가 이렇게 태어난 건 내 잘못이야, 와 내 잘못이 아니야, 가 충돌했고 상황에 따라 전자가 이기기도 했고 후자가 이기기도“(32,1) 한 여학생의 심경에 이렇게 많은 변화가 벌어진 건 애초에 란이가 생각이 깊은 아이여서 그런 걸로 밖에는 이해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특수한 아이라 수많은 교훈을 한꺼번에 깨달은 걸로 보였다. 그 짧은 페이지 안에서 생각이 달라졌다는 건 엄청난 사건을 겪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사람이란 곧잘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공 란이가 받아들이는 교훈에 대한 전개가 너무 빨라 딱 한 가지만을 건져야 하지 않을까싶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꽤 자연스러운 교훈을 마주했다.

 

바싹 말라 마치 죽은 것만 같던 나뭇가지에 점점이 이파리가 돋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것은 자연의 순리다. 그럼 힘들었던 한 시기가 지나면 훌쩍 성장해 있는 것도 인생의 순리 일 것이다. 란이는 콩이와 할머니, 남자를 바라봤다.(190,10-191,1)

 

 

상황은 달라진 거 없어도 교훈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란이는 늘 그랬듯 부족한 민성이에게 짜증도 낼 것이고 서운한 감정도 느낄 것이다. 여전한 집구석, 바뀌지 않는 아빠를 보며 한숨도 쉴 것이다. 란이는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여고생이기 때문이다. 투정부려도 된다. 그런 아이에게 너무 많은 교훈을 떠먹여주려는 작가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딱 건질 수 있는 한 가지만으로도 족하지 않았을까.

 

어떤 교훈은 급박한 환경과 사고 속에서 단번에 깨닫기도 하지만 어떤 교훈은 10년이 지나야 겨우 깨닫는 것도 있다. 삶에 켜켜이 쌓인 층위를 짧은 시간 안에 느끼게 만든 작가의 전개력에 급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언젠간 주인공이 체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따금 청소년 문학 소설을 읽을 때마다 여고생 내지 남학생에게 이입해 자기 자신을 묘사하는 글을 발견한다. 어린 자신에게 빚을 졌기 때문일까, 비슷한 인물을 묘사하려다보니 챙겨주고 싶은 게 많아서 인걸까. 마음은 이해한다. 다만 좋은 교훈들만 모아다가 먹인다고 사람이 원하는 대로 자라지 않는다는 걸 기억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