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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서

25시, 26시... 시간마저도 사들여 망가지는 사람들:『숲의 시간』

 

숲의 시간
김진나 지음 | 문학동네 | 192쪽 | 1만1000원

 

누군가의 아름다움을 흠모할 수는 있으나 그 아름다움을 훔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아름다움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다. 욕망은 할 수 있으나 훔칠 수 없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을 가질 만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생태계는 돈이면 모든 아름다움을 살 수 있다고 속삭인다. 자유와 사랑, 우정과 시간까지 모조리…. 그래, 모든 걸 돈으로 사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편리할까. 또 얼마나 편리하게 썩어 버릴까. 모든 존재에는 유통기한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삶에도 정해진 시간이 있다. 정해진 시간을 무제한으로 만들려는 무모함이 돈의 존재와 인간의 욕구에서 출발한다.

이 책 ‘숲의 시간’에서 묘사된 도시 크룽을 보면 알 수 있다. 자본주의 생태계로 직조된 크룽은 그 어떠한 공간 중에서도 기술집약적(16,2)이다. 누구든지 가진 자들의 주거지인 바탕 구역에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빈민들의 공간(17,2)을 따로 분리한 눈속임 도시일 뿐이다. 대부분은 젊은이의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며 늙은이를 불안하고 게으르게 만든다. 도시는 점점 해 아래 잠식하지만 그 어떤 어둠보다도 뜨겁고 늪처럼 질척거린다. 망가진 도시에서 고장 나지 않은 사랑을 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망가진 도시의 망가진 사람들은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흠모하고 빼앗으려 안달 나 있다. 따라서 늙은이들은 아름다움을 가지기 위해 젊은이의 젊음을 착취한다. 젊은이는 먹고 살아야 하므로 자신의 젊음을 값싼 노동력으로 내어 판다.

이들이 망가진 이유는 무엇일까. 아름다움을 욕망하게 만드는 자본주의 생태계 때문이다. 이들은 분명히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조각품이나 사진, 노래, 공간에 의해 되살아나지 않는다. 오직 아름다움은 그 순간 빛을 발했다가 머지않아 사라질 뿐이다.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아름다움이 남길 바라는 욕망이 이들을 망가지게 만든 것이다. 그 아름다움이란 그리움이다. 다들 그때의 아름다움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시간을 되돌려서라도 말이다. 늙은이는 젊은이를 짓밟아서라도 그리워했고, 젊은이는 자신의 젊음을 허비해서라도 그리워했다.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밖에 사랑할 줄 몰랐다”(46,1) 애초에 크룽은 “동기와 욕구로 조직된 시스템”(55,9)이다.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자본주의로 직조된 세계다. 돈이 있는 자라도 그리움을 사들이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해야 했고 누군가의 노동력을 착취해야 했다.

 

 

젊은이는 값싼 노동력으로

늙은이는 빈곤과 불안으로

스스로 착취하는 도시 크룽

 

얼룩진 시간 정책

욕망하게 만드는 자본주의

삶조차 망가지고 허비하자

끝없이 가난해지는 사람들

크로노스社 “시간도 파세요”

 

도시 기술 나날이 발전해도

자연의 힘 거스르지는 못해

 

지금 이 순간의 아름다움

손에서 사그라졌을지라도

충만한 삶으로 만들어가야

 


이 도시의 사람들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내일을 꿈꾸지 않는다. 오로지 져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곧 늙을 나 자신을 한탄할 뿐이다. 늙음에는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내일이란 시간이 주어짐에도 오늘 하루를 살아가기에도 빠듯한 시간 체계를 살고 있다. 1시간을 더 할 수 있다면, 아니 허비하는 시간을 박박 긁어 내다팔아서라도 아름다운 굿즈를 사 허기진 마음을 배불리 할 수 있다면. 시간 매매 기술을 개발한 회사 크로노스는 도시의 욕망을 정확히 읽어냈다. 도시는 첨예하게 발전하지만 인간의 능력과 존재는 점차 퇴화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 거꾸로 시간을 팔아 돈을 벌었음에도 빈곤해질 뿐이다.

왜 과학과 기술은 발전해도 사람들은 빈곤해질까. 왜 아름다움은 사그러지는 것일까. 왜 그리움은 인간을 고독하고 외롭게 만드는 것일까. 왜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돈과 기술로도 무한한 삶을 살 수 없는 것일까. 크룽의 시스템으로는 “왜“에 답하지 못한다.

도시는 빈곤하지만 자연은 충만하다. 가난하거나 부하다는 개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충만함이다. 들녘의 따뜻한 바람은 여유로움을 가져다준다. 가진 게 없는 우주의 삭풍은 인간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씻어버린다. 도시는 끊임없이 비교 의식을 심어 줌으로써 도파민을 통해 쾌감을 선물하지만 자연은 속에서 솟아난 생수가 되어 스스로의 목을 축이게 한다.(요한4,14) 자연은 말 그대로 ‘그러함’ ‘스스로 있는’ 그 자체로의 답이다. 

 스포일러 주의   숲에서 만년을 걸어온 소년 주루는 크룽의 사람들과 달리 자연의 힘을 알고 있었다. 자연에서 불어오는 사랑의 힘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노동의 빈곤함에 허덕일 때 주루는 하나 뿐인 동생 주연을 위해 노동했다. 사라진 주루를 찾아 죽음까지도 불사한 하민이도 다르지 않았다. 죽어가는 빈곤한 자들을 향해선 “최악의 고통이 어떻게 강한 힘이 될지” “사사로운 감정에 매이지 말라”면서도 모든 시간을 사들여 자기 딸을 찾으러 미지의 세계로 과감히 몸을 내던진 하민의 어머니처럼. 아름다움을 빼앗으려는 크룽의 뻔뻔한 욕망이 발 디딜 틈조차 없다.

실재 시간인 크로노스와 달리 체험 시간인 카이로스는 사람에 따라 느리게 흘러가기도 빠르게 흘러가기도 한다. 누구나 사람은 시간을 허비하며 살기도 하고, 때론 충만하게 살기도 한다. 그럼에도 젊은이의 노동력은 늙은이가 착취할 대상이 아니요 늙은이의 지혜도 젊은이가 빼앗아갈 대상이 아니다. 각 사람에겐 살아갈 시간이 주어진다. 삶이라는 시간 속에서 살아온 족적에 따라 성장하는 이도 있고 퇴보하는 이도 있다. 살아 숨 쉬는 이 자리에서 제 역할에 충실할 때 각자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 아름다움은 흉내 낼 수 없는, 유일한 아름다움이며 훔쳐갈 수 없다. 따라서 아름다움을 보더라도 흠모할 수는 있으나 그것을 훔쳐가는 뻔뻔함을 내보이지는 않는다. 애초에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몸에 맞지도 않을 뿐더러 빼앗은 순간 이미 아름다움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