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재완료/신학; 신앙

[다시 쓰는 은혜사] <2> 기억이 소거된 그 곳, 방송실

입력 : 2018. 08. 31 | A20

 

다시 쓰는 恩惠史, 교회편: 나는 어디로 가나 <2>

 

무려 6년 넘게 움직이던 활동 장소였다. 교회는 2010년 이사하면서 방송실을 따로 마련했다. 사진은 2010년에 제작한 파노라마.

 

 

“너, 방송일 해보는 게 어때?”

 

교회 창립 행사가 끝날 즈음, 그 때였다. 방송 시스템을 구축한 집사님이 내게 제안했다. 흔쾌히 수락했다. 디자이너도 울고 갈 최초의 방송 시스템은 휘황찬란했기 때문이다(너무 촌스러워 마음에 안 들었다).

 

교회에 방송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시스템 이래 봐야 하드디스크 39GB, 메모리 4GB, 4:3 모니터, 두꺼운 본체에 빔 프로젝트 연결해 둔 체계에 불과하다. 그땐 화면 비율 16:9 존재조차 몰랐다.

 

하나 둘, 배웠다.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어렵지 않았다. 화살표 누르며 가사를 바꿔주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으니까.

 

문제가 발생했다. 담목이 복음성가를 띄우라는데 복음성가는 없었다! 찬송가 558장 외, 복음성가라는 새로운 장르 가사를 제작해야 할 상황이었다.

 

집사님에게 여쭈었다. 직접 제작해도 되겠냐고. 그 때부터다. 방송 일을 자발적으로 독립해 활동하던 첫 걸음. 2008년, 여름이었다. 팔을 걷어붙이고, 새로운 디자인으로 프레젠테이션을 제작했다. 복음성가 디자인이 찬송가와 다르면 안 된다는 판단에 찬송가 가사도 다시 제작했다.

 

생각해보면 미친놈이 따로 없다. 어떤 놈이 그 많은 558장을 제작하려 했으니. 매년 여름, 겨울은 프레젠테이션 만드느라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순전히 자발적 활동이었다.

 

찬송가 제작이란 거대한 빚은 2008년을 넘어 2015년에도 이월됐다. 7년간 만든 건 아니다. 558장은 ‘새찬송가 645장’으로 바뀌었을 뿐(눈물을 삼키며 구 찬송가를 폴더 채 옮겨둔 그 때가 지금도 아뜩하다).

 

무려 7년 넘게 혼자서 활동하다 덜컥 받아 든 입영통지서보다, 일찍 전출을 경험했다. 학생청년회에서 방송실로 파견(?)온 전출 신병이었다. 이제 고등학교를 입학한 남학생이다. 한 번 설명하면, 한 번 만에 알아들으니. 나보다 말귀가 밝았다.

 

꽤 즐거웠다. 혼자서 고통스레 할 일을 누군가도 함께 고통을 당해야 했으니(ㅋㅋ). 세계대전당시 ‘함께 고난당하는 하느님’이란 이론도 존재하지 않았던가. 생각보다 방송실로 밀려드는 업무를 깨달았는지 묵묵히 나와 함께해 고통을 소거시켰다. 훗날 전해들은 이야기지만, 내가 불쌍해 보여 도와주고 싶었다고 하니(ㅠㅠ). 

 

처음, 에프터이펙트로 제작한 동영상. 물론 망했다. 여름, 청년학생회 특별 행사를 위해 제작했다. 이 땐, 교회를 나오고 싶었다. 상당히 우울했다.
밤샘 근무/성탄절 전 날,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하던가. 밤 새지 않으면 일을 마치지 못했다. 한창 성탄절 연극 동영상 제작 중인 광경.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이 참...

 

 

의외로 할 일이 많다. 우선 예배마다 가사와 예배 순서 자막을 제작해야 한다. 주보가 발행되는 토요일 저녁, 후딱 끝내면 반때지만 찬양 순서가 늦게 발표되면 얄짤없이 12시를 넘겨서 잠을 자야 했다. 특별새벽예배 때는 15분 전에 도착해 방송실에서 준비하곤 했다. 밤샘 근무도 한다. 창립 기념일, 성탄절, 송구영신예배, 특별행사 땐 밤 샌다고 보면 된다.

 

밤을 새도 재밌다. 성탄절 연극 준비가 유독 그랬다. 마이크 없이 생목으로 대사를 외면 실수도 하고, 연습 시간도 길어지니 아예 녹음해서 하나의 동영상으로 제작하자고 제안했다. 교회서 나름 열심히 일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 떠오른 아이디어였다. 혼자서 밤새가며 OST까지 넣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키득키득, 피곤함에 혼잣말도 던지며 장난을 건네는 고귀한 시간이었다.

 

그 밤샘 근무를 막고자 파견 온 아이에게 미리미리 해놓자며, 평일 저녁에 부르곤 했는데. 편집 방법 보여주겠다고 OST도 함께 고르고, 커다란 스크린에 띄울 배경화면을 포토샵으로 폼 나게 꾸며대면 우와하고. 녹음한 파일 일일이 잘라대며 키득거렸던 그 때가 그립다.

 

그러다 그간 잊고 살아온 몇 가지가 떠올랐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교회 집사님 말이다. 방송실 만들어주고, 풍족하게 일하도록 응원해주셨는데.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셨다. 4년 동안 못 만든 찬송가 가사, 1년 만에 공정률 80%에 달한 것도 놀라웠다. 지금 고생해 내일 편하길 바라는 마음이 압도한 결과다.

 

오늘따라 더욱 생각나는 건, 방송실로 파견되기 10년 전. 마지막 예배에서 회중석에 앉아 내 손 잡으며 함께 찬송을 부른 세탁소 집사님이 떠올랐다. 아들처럼 생각해준 분이었는데. 일에 취하느라, 기억에서 소거되고 말았다. 지금도 가끔, 호프집으로 바뀐 세탁소 건물을 바라보며 그 집사님을 생각하곤 한다. 그때가 15살이었다.

 

율동도 가사와 사진을 입혀 하나의 동영상으로 제작했다. 음원과 가사가 따로 움직이지 않도록 해야 실전에 일손이 줄어든다.
분홍빛 물든 예배당/교회를 찍은 사진 중 가장 마음에 든다. 서로가 다른 개인이 한데 어울러 하나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 만큼 많은 시간을 교회 행사에 투자해야 했고, 투자한 만큼 보상 받지 못해 교회를 떠난 분들도 많다.
지금도 저 분할 기계에 어떤 텔레비전이 연결 되어 있는지, 잊지 못한다. 문제가 발생해도, 교회는 덮어버리고 만다. 현실에 맞서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먼지를 마시면서 정리해야 할 텐데. 먼지로 뒤덮인 선은, 다음 해가 되어서야 드러났다.
암이 낫다/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이는 장면!
진작 청소했어야 했는데!
건물을 지으면서 박아놓은 선 때문에 완전히 깔끔해지지 못했다.
도와줘/사랑의 빵 동전 모으기 행사를 진행한다기에 교회 여학생에게 저금통을 들어달라고 부탁했다. 포토샵으로 손과 저금통을 자르고, 광고에 넣었다.
본지가 지난 2016년 12월에 보도한 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