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우[now]

[커버스토리] 오늘은, 시대여행①

입력 : 2020. 01. 07 | 수정 : 2020. 01. 07 | B1

 

분명히 우리는 다른 시대를 살아간다. 시대가 바뀌면 사람도 변하기 마련이다. 학부 시절 함께한 친구를 졸업 후 1년이 지나 만났다. 여전한 모습을 여전한 풍경에서 맞이했다. 내가 살아가는 시대가 ‘신 죽음의 시대’라면, 대풍이의 시대는 ‘신 중심의 시대’ 시규에겐 ‘알 수 없는 공허한 시대’다. 아, 신이 죽었다는 말은 선언이 아니다. 내게 신의 영향력이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대풍이에게 신은 여전히 살아 있고 영향력을 끼치지만 내가 믿는 그 신은 오래전부터 무응답의 답보 상태다. 그럼에도 살아있다고 변증한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으셨다. 말 그대로 인식 속에서 사라져간 신의 영향력을 ‘신의 죽음’으로 표현한 거니까.


 

 

조선일보 1면은 심플했다. ‘정경심 구속’.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해 챙겨들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다른 신문사와 달랐다. 모자이크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정 씨를 보며 어쩌다 그 지경이 됐을까 혀만 끌끌 찼다. 그런 386을 하나로 엮어 정의의 사도로 빙의한 조선일보도 우스웠지만 자신을 정의라고 생각한 조국 전 장관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처구니없는 건 한국 정치뿐만 아니었다. 얼마 전 사설로 담아낸 ‘우리는 모두 신 죽음의 시대에 산다’는 메시지로 한국 교회 안녕을 물었다. 전(前) 모교는 성경에서 동성애의 길을 묻는 우스꽝스러운 서적을 책이라며 당당히 펴냈다. 전(前) 교회는 ‘원 데이(One day)’라고 교회를 초정해 예배를 진행했다. 다 아는 얼굴, 지인들과 끼리끼리 모여 지들만의 하느님 나라를 불러대는 꼴이 역겹기 그지없었다.

 


며칠 전 본지 사설을 게시 중단한 저 먼 곳 명일동의 명성교회까지 인상의 폭을 넓히지 않아도 괜찮다. 아직도 칼빈과 알미니우스로 멱살이나 잡으며 키배 중인 한국 교회의 안녕은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이다. 신학적 시대착오를 고사해도 성서비평조차 마귀적이고 인본주의라고 지껄이는 한국 교회의 안녕을 보노라면. 왜 정식으로 국가로부터 공인받은 신천지가 이리 뛰고 저리 뛰는지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지금 시대 한국 교회의 안녕을 묻는 것도 이제는 귀찮고 지겹다.

 

 

어처구니없는 시대에
어처구니없는 한국의 정치 판
우스꽝스런 교회들 풍경 보니
교회라곤 뭐가 다르겠느냐만

시규·대풍 만나러 가다
학부 4년 함께해 온 시규·대풍
이제껏 살아온 시간, 다르지만
구두끈 매고서 만나러 갑니다


그렇지만 곧 만나려는 둘, 신학교 4년을 함께한 최시규, 윤대풍은 다르다. 이름도 공교롭게 “시”, “대” 아다리가 맞는다. 분명히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지만 흥미롭게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 윤대풍은 신학대 석사생의 시간을. 최시규는 공허한 신앙의 시간을. 나는 신 죽음의 시대를. 살아가는 시간과 시대는 다르지만 우리 셋이 공유하는 한 가지 지점엔 우리가 살았던 과거라는 시간만이 존재한다.


어처구니없게도 한국교회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간다. 교인들 눈치 보며 자기 밥그릇 지키기 위해 혐오를 밥 짓는다. 이제 현대인은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갓(God)을 접두사로 사용하고 아이돌이 삶의 한 자리에 차지했다. 신은 철학서에 니체와 함께 죽은 존재로 박제됐다. 신조차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재밌는 시대에 살고 있다. 누구도 서양 전통적이고 기독교적인 신 존재를 묻지도, 찾지도 않는다. 주체적 삶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자유로울지 모르나. 그 신조차 소비되는 극단에 존재론이 묻힌다. 자유를 느끼면서도 슬퍼하는 이유다. 이 양가적 감정을 그들은  느끼지 못할 만큼 우리는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간다. 나에게 지금의 시대는 신 죽음의 시대인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신 죽음의 시대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이들을 만나려는 이유다. 그래서 오늘 만남을 ‘시대여행(時代旅行)’ ‘시대회담(時代會談)’으로 정했다. 며칠 전, 동시에 방문할 전시회도 추려냈다. 아침에 일어나 구두끈을 조이고 집 밖을 나섰다.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어떻게 놀아 볼까. 신학도, 신앙고백도 서로 다른 환경과 시간이란 배경을 두고 살아가지만. 여전히 친구라는 공통의 시간이 존재하기에, 지체 않고 이들과 만나기로 약속했다. 1년 만이다. 다시금 내 안의 병맛이 살아날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