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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지애문학

[지애문학] 기억을 기억하는 이유

 

본문의 사진 속 장소는 이 글·본지 편집 방향과 무관함을 밝힙니다.

 

 

각이진 턱에서 돋아나는 입가의 주름 그 입에서 쏟아지는 무책임한 단어들. 몇 년이 지나도 여전했다.

“얼마만이죠?”

“그러게요. 마주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요. 호호.”

새신자환영회실 지나쳐 곧바로 12교구 담당 전도사와 바쁘게 걷는 걸 특권처럼 생각하던 이 분위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도착한 상담실에선 그 여러 해 동안의 회포가 이어졌다.

“이 교회 저 교회 전전하고 교구장까지 해봐도, 우리 교회 만하지는 않더만. 시설 좋지, 목사님 좋지, 성도들 좋지, 분위기 어때, 신앙심도 이만한 데가 없다고.”

“네.”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힐 때마다 나오는 특유의 표정을 잘 안다. 살짝 고개를 기울어 다문 윗입술로 아랫입술 닫아줄 때 발생하는 무표정. 마구 휘갈겨 적는 종이 위엔 정자로 인쇄된 교적 전입처리가 바싹 말라 있었다.

“그 때 일 유감스레 생각해. 내가 오죽 입방정이겠어? 세상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지. 깔깔깔.”

“네.”

순간 아랫입술 깨무는 게 보일까 싶어 고개를 숙이고 끼적여 놓은 글들을 일부 수정했다. 인터넷 칼럼에서 읽은 글이 떠올랐다. 난파선을 벗어날 때 스쳤던 파수꾼 앞에서 무슨 말을 더 하느냐던 물음. 물어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꺼내길 좋아하던 당신의 글에서 가슴을 못 박은 구절을 발견했다.

‘머잖아 침몰할 난파선으로 돌아간 파수꾼의 심정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붙잡을 지푸라기 없으니 무너질 난파선이라도 붙잡아야 하지 않겠나.’

그래. 먹고는 살아야 할 테니 사업가 기질도 발휘해 이 교회 저 교회 옮겨가며 발품 팔이라도 하긴 해야겠지. 아무도 건들지 못하는 살기 위해 네 글자 위해서라면 내 머리채를 잡아끌어 이 년 저년 내뱉을 수도 있는 거겠지. 그때 일은 미안했고, 그렇게 생각했다면 미안하다 한마디로 끝날 테지. 살기 위해 몸 버려 다함께라는 난파선을 벗어나려던 선택, 그거 무시 안 해.

금의환향(錦衣還鄕) 마냥 달라진 것 하나 없는 50대 아주머니 뒤로하고 문서더미를 팔로 안은 채 걷는 폼을 예수라는 인간이 바라보면 뭐라고 지껄여줄 지가 무척 궁금했다.

사무실에 도착했다. 문서 더미를 던져 버렸다. 이때의 표정도 잘 안다. 못 생겨서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 잘 안다고. 그 따위 표정 관리하라는 말 말라고.

“저렇게 살게 나둬, 구역장 아무나 해? 저러다가 몇 푼 못 건질 거 뻔하잖아.”

힘없이 앉아서 듣고만 있었다.

“이번 달 통계는 내가 할 테니까 정리 좀 하게 쉬었다가 메일로 보내.”

강신혜 듣고 있냐던 말도 들리지 않았다.

“괜찮아?”

여러 숨을 골라서야 말할 용기가 생겼다.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지. 왜 기억하는 줄 알아?”

“…….”

안아주는 동료가 남자친구로 보이지 않았다. 흐느끼는 이 모습도 주님은 사랑해주실까. 죽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나마저도 받아줄 수 있느냐고. 당신은 못하더라도, 이 녀석은 받아주지는 않을까. 그래서 고맙다고.

“…… 기억해 주는 것. 이게 사랑이니까…… 그때의 아픔을 간간히 버텨내며 지금까지 살아 숨 쉬게 하루하루 견뎌준 그때의 나를 사랑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