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율아, 문정이가 그렇게 좋아?”
“쟤 최문혁 꿈 꾼 거야. 요즘 최문혁 사는 동네에 신문 돌린다고 존나 일찍 일어나잖아. 부럽다. 나도 키 큰 남자가 아기새처럼 감싸줬으면 좋겠다.”
자국 따라 뺨을 매만지느라 언니들의 농담을 흘겨 들었다. 좋아하는 이름을 입으로 굴리는 버릇. 그게 꿈에서까지 이어지다니.
“잉, 귀요미 나율이가 이 연약한 다리로 너 따라 달동네 오르내리는데 고생하잖아.”
“문소혜. 기사 승인이나 내.”
하루가 지났어도 가슴에 남은 자국이 또렷했다. 스크래치일까 충격일까. 좁은 틈 사이로 스며든 황금빛 노을에 비친 할아버지 사진이 그려졌다. 목 굳은 자세로 선 젊은 할아버지는 지금처럼 웃지 않았다. 훈장을 걸어둔 벽에는 여생 절반을 함께해 온 할머니 영정과 몇 가지 스크랩한 종이 신문이 액자에서 먼지와 함께 바랬다. 소박하다 못해 숨 막힐 듯한 라면 봉지에 목숨을 바쳤다던 할아버지의 말이 거짓말 같았다.
이 모든 건 최문혁 때문이다. 네가 아니었으면 쳐 다도 안 봤을. 진성동 재개발 3구역.
우다원. 우,다,원. 우…다…원….
동글 거리면서도 단단해. ‘우’에서 입술을 귀엽게 모으다 갑자기 치고 들어가는 ‘다’. 이응으로 동그랗게 말아 들어가다 깔끔하게 매듭 짓는 ‘원’. 미끄러질 듯 ‘우’와 ‘원’을 잡아주려는 담백한 위치의 ‘다’. 당장 혀로 느꼈을 땐 동글 거리지만 꽉 잡아주는 젠틀함이 마냥 귀엽지만은 않아. ‘다’는 자기가 담백한 존재로 불린다는 걸 알기나 할까? 손글씨로 쓸 땐 또 달라. 딱딱한 명찰의 굴림체로는 귀여운 맛을 담지 못한다구. 우다원이 말랑하게 쓴 우다원 특유의 우격다짐체, 혓바닥 구르는 맛, 그래서….
“김나율!”
또 멍 때렸나보다. 언니가 슬슬 짜증낸다.
“네!”
또또, 그 습관. 이런 표정으로 바라본다.
“김나율! 너 대신 존나게 무거운 삼각대 들고, 땀 삐질삐질…. 정신 차려라, 진짜!”
“언니, 미안….”
모든 이름이 그런 건 아니다. 사탕처럼 입안에서 달달하게 퍼지는 이름의 맛이면 다 좋아한다. 새삼 내 이름 예뻐 보이던 밤이 그랬다. 불 꺼지는 순간까지 입술에 비친 그 이름을 굴리고 굴렸다. 입학하고부터 반 친구들을 지나쳐 우다원까지 손가락 개수보다 많은 이름들을 굴리고 또 굴렸다. 내가 영어를 못하는 이유도 한글보다 못 생긴 알파벳 탓이 아닐까 믿어도 보았다. 하지만 어떡해. 좋아하는 이름만 보면 정신 줄 놔 버리는 걸.
“됐고! 아줌마 나오면 사진이나 잘 찍어. 노출 값 확인 했나 살피고.”
급한 마음에 헛발 디딘 언니가 넘어져서야 방송국 놈들 장난이란 걸 알아차렸다. 밀려드는 인파 사이로 그 애들이 째려본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언니는 가장 먼저 눈에 치인 녀석의 멱살을 잡았다. 제일 큰 목소리로 우짤래미 저짤래미 거리던 녀석의 숨통을 조이자 순식간에 모든 시선이 집중됐다.
“야, 야! 최문정. 실수였어, 실수!”
같은 편으로 보이는 여자 선배가 언니를 밀쳐버리면서 싸움으로 확전됐다. 주변에선 격투기라도 보듯 가던 길을 멈추었다. “오” 그리고 “와” 끝에선 “싸워라”가 아우성 콘서트로 뒤덮었다. 한 순간 벌어진 난장판. 어떡하지, 어떡하지. 벌게진 언니의 얼굴. 하얗게 먼지로 얼룩진 교복. 뒷걸음치다 누가 미는 바람에 나 모르게 남자애 발을 밟았다. 귀 떨어질 만한 짜증에 압도당해 말 한마디 못 꺼냈다.
“김나율! 밟았으면 사과해야 할 거 아냐!”
눈을 질끔 감았다. 아빠 얼굴만 생각났다.
“비켜.”
살짝, 조금씩, 눈을 떠보니 모르는 남자애가 낚아채가는 걸 느꼈다. 어깨에 실린 든든한 힘. 정신 차려보니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나 모르게 “비켜” 말하는 목소리에 취해 아무 생각도, 말도 못했다. 단지 그 애가 최문혁이라는 이름을 가졌을 뿐이라는 것만 알았을 땐 이미 없어진 상태였다.
최문혁이 진성동 재개발 3구역에서 산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새벽이면 저절로 눈이 뜨였다. 오지 않았으면 했을 새벽녘은 최무녘이 되고부터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새벽부터 보고 싶게 만드는 최무녘.
‘최문혁’이라는
완성된 자음 모음
네 이름 부르면서
부드러운 애일지
거칠기만 할지
가늠하고 상상한다
불규칙하다 못해
거칠기만 한
진성동3구역
계단 오르며
네 이름 담는다
최무녁. 최,문,혁. 최…문…혁….
“저-어기 꼭대기 보이지? 저기까지 올라가면 돼.”
“언니, 진짜 새벽부터 이래야 돼? 우리 다시 생각해보자. 응?”
언니가 입술을 깨물었다. 힘들어서 울 것만 같았지만 마지막 집이라기에 후딱 다녀오자고 마음먹었다. 학보에 실을 달동네, 그러니까 진성동 재개발 3구역이 우리를 새벽부터 신문 배달하게 만들었다.
“모든 기사는 직접 발로 뛰어야만 쓸 수 있어. 왜냐면 우리 기사는 인터넷 어디에도 없으니까.”
“아줌마가 또 자르면?”
일단 질러보자는 건지 대책 정돈 생각해 둔 건지. 하여튼 고생한 만큼 대가는 없는 것 같아 그게 걱정 됐다. 토 나올 정도로 불규칙한 계단에 헛디딜 뻔할 때면 두 눈 크게 뜨였다. 그냥 편한 데 이사 가시지 왜 이런 곳에 사실까. 힐끔 언니를 엿보았다.
“돈이 없으니까. 도심지에서 먼 집으로. 쫓겨나는 거야. 지하철하고 가까우면. 그만큼의 돈을. 내야하니까. 돈 많은 사람은. 시간도 사는 거지.”
기어이 도착했다. 언니는 신문 아래다가 이아매를 깔아뒀다. 이른아침매화. 공들여 제작한 우리 신문. 신문을 감싼 비닐이 바람에 펄럭인다. 매직을 꺼내 배달 목록에 체크했다. 그리고.
“안 오고 뭐해?”
“잠깐만!”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쓱싹쓱싹.
내려오는 길 편의점 평상에 앉아서 음료수를 마셨다. 한 모금 넘기는 탄산에 기분이 좋아졌다. 언니가 기지개를 펴자 에너지가 방출되는 듯 괴성을 내질렀다. 하품 끝, 자기도 모르게 내지른 표정에 나나 언니나 실실 웃었다. 무모한 일을 끝내면 늘 이렇게 웃는다. 오늘도 언니는 꼭두새벽부터 나보다 배로 뛰어다녔다. 새벽 4시부터 달리는 우리 모습이 바보 같았다.
처음 학보사에 들어왔을 때였다. 옆자리에서 몰래 언니 노트북을 들여다보았다. 빼곡한 기사 파일의 정체가 궁금했다. 사회부로 배정 받자마자 오래도록 사회부 기자는 최문정, 언니 한 사람 뿐이란 걸 알고부터 퇴사가 마려워졌다. 말없이 쳐다만 보았다. 오늘의 무모한 짓이 어떤 기사를 만들어낼까. 언니의 얼굴이 파랗게 물들어갔다.
“나율, 이따 봐.”
도착한 버스를 타고 사라진 언니를 뒤로하고 오늘도 최문혁이 스쳐갔다. 볼 때마다 궁금했다. 도대체 찍는 게 뭘까. 골목길 중간 중간 멈춰서 사진을 찍는다. 두어 발걸음 걷고 멈춰서 또 찍기를 반복한다. 카페, 원룸, 전봇대, 편의점. 오늘은 몇 군데가 빠지고 늘었다. 왜 그런 델 찍는 거지?
횡단보도 멀리서 조금씩 거리를 좁혀 갔다. 긴장하게 만드는 순간이다. 여기서 달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따라잡으려 하면 고양이 마냥 골목길 사이로 숨어버린다. 심호흡 크게 들이마셨다. 신호가 바뀌었다. 먼저 두 눈으로 최문혁을 따라갔다. 두 발로 골목 사이를 들이닥치자마자 내 앞을 가로 막은 건 육중한 무게의 리어카였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말없이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확인하고 다시 이동한다. 최문혁은 편의점 앞에서 아주머니에게 인사하던 중이었다. 리어카에 바짝 붙어 숨었다. 오리걸음으로 한 걸음, 두 걸음. 그러다 멈춘 곳은 원룸 앞. 허리가 불편한지 어색한 자세로 숙여다가 하나 둘 줍기 시작한 할아버지 뒤로 편의점 쪽을 바라보았다. 최문혁이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를 도와 박스를 올려다 드렸다.
“그냥 놓으면 안 돼. 최대한 납작하게 해다가 놔야 한다고.”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기껏 도와드렸더니. 다시 할아버지는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확인하고 리어카를 끌었다. 뒤에서 할아버지에 발걸음에 맞추어 조금씩 힘을 실어 밀었다. 허리춤에 찬 스마트폰에선 정치 평론이 새어나왔다.
“알려주셔야죠.”
“무얼?”
“최문혁에 대해서요.”
“아, 그려?”
“‘아, 그려?’라뇨. 걘 인스타, 에스크도 없어서 어떻게 사는지 무슨 생각하는지도 몰라요. 친구도 없고 혼자 다니고. 맨날 새벽 일찍 일어나고, 꾸준히 사진도 찍고. 그래서 뭐하는 애인지 알고 싶어요. 좋아하는 건 뭔지 좋아하는 애는 있는지. 있잖아요. 학교에서 어떤 애랑 싸울 뻔 했는데. 탁하고 나타나서 절 구해줬어요. 마이로 덮어서 데리고 나갔는데 꽉 붙잡아가지고 명찰이 뜯겨져서 알게 된 이름이라구요.”
“녀석, 웃어른한테두 인사 잘허고 착허기두 허지. 최, 최무녁. 최,문,혁.”
저언-혀 착한 애 같지는 않던데. 할아버지, 최문혁에 대해 알기는 하는 걸까.
“할아버지도 이름 곱씹으세요?”
“힘들어서 함 불러본 겨.”
“저는요. 한 음절씩 불러 봐요. 거친 이름인지, 부드러운지, 귀여운지, 달달한지. 최,문,혁. 치읓하고 히읗이 거칠 것 같은데도 가운데 미음이 들어간 문이 부드러우면서도 딱딱해요. 치읓하고 히읗 사이에 미음이 그래요. 미음 대신 이응이었으면 너무 느끼했을 거예요. 거칠 때도 있지만 부드러운 것도 같아서 계속 생각난다구요. 음, 단짠처럼? 히히. 근데요. 막상 최무녁. 발음해보면 히읗이 사라져서 저녁 같기도 하고, 해질녘 같기도 하고. 이건 그냥 제 생각이에요. 최, 문, 혁. 최무녁. 근데 할아버지는 이름이 뭐예요?”
“정연.”
“여자 이름 같은 데요? 성은요?”
“호야 호. 아호.”
힌트 하나 안 주는 할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다 학교 방면 골목 샛길로 새버렸다. 안녕. 할아버지.
학보사에 들어오자마자 아호를 검색했다.
‘치. 뭐야. 별명 같은 거잖아.’
그 아래 바보도 보였다. 일본어로 바보.
“이거 봐봐. ‘있다’가 너무 많아. ‘더운 여름을 지피고 있다’ ‘귀추가 기대된다’ ‘기대를 모으고 있다’ ‘있다’ ‘있다’ ‘가지고 있다’ ‘만나고 있다’ 그 대신 ‘가졌다’ ‘만졌다’ ‘지폈다’ 이렇게. 귀추 어쩌고나 기대 어쩌고 모두 다 같은 표현이야. 둘 중 하나를 선택해. ‘매화학원 아줌마 이사장이 지난 24일 진성동 재개발 3구역에 위치한 분교 건설 현장을 찾고 있다’ 이것도.”
아호. 정연. 최무녁.
“그리고 ‘소혜를 밝혔다’가 뭐야. 소회겠지. 문소혜를 왜 밝혀.”
“흐흐 나율이 너,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던 거야?”
할아버지는 그냥 지나치는 아이쯤으로만 알고 있는 것 같다.
“왜, 왜 이래? 흐흐는 또 뭐야.”
“알겠어. 너한테만 웃어줄게. 흐흐.”
“그렇게 웃지마. 소름 돋아.”
여백에 미음, 히읗, 지읒, 이응을 그렸다.
“나율아. 건조하게 써보는 거야. 쓰고 싶은 글을 문장채로 듬성듬성 쓰고 나면 줄글이 되잖아. 스무 번 다시 읽어가면서 필요 없는 문장, 단어를 지우는 거야. 또 한 번 매끄럽게 다듬다가 그래도 별로 다? 그럼 싹 지우고 다시 쓰는 거야. 어떤 단어가 좋을지 입말로 말하고 말하다 보면 언젠가는 완성 돼.”
“받고!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사귀고 싶다고 걍 질러버려! 최! 문! 혁! 오늘부터 1일 가즈아!”
문정이 언니가 소혜 언니를 째려본다.
“나율아. 글은 열심히 써줘서 좋았어. 이제 뭘 지워야할지 생각해봐.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건 알아. 장황하면 읽는 사람들이 뭘 말하려는지 모른단 말야. 여기서 두 문단 정도만 지워보자.”
학교가 끝난 시간에도 할아버지는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갈 뿐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쫓아갔다. 어깨 빠지게 힘없이 리어카를 끌고 간다. 새벽부터 지금까지 박스만 주운 것 같았다. 조금 거리를 두었다. 할아버지에게서 소리가 묻어났다. 대통령과 개헌이란 단어가 주위를 떠돌다 사라졌다. 철컹 덜컹 소리들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숨소리가 나 좀 쉬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뭐예요. 아호, 그거 일본어로 바보라면서요?”
“언덕 아 좋을 호도 있는 겨. 친하게 붙어 다니는 사람.”
“할아버지. 지금은 왜 핸드폰 안 보세요?”
“아이 그야, 볼 게 없으니께.”
”언제 끝나시는데요.”
“천원 어치 더 모으고.”
하루 종일 박스만 줍고 다니셨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하교하는 시간까지도 멈추지 않은 리어카에 바짝 붙었다. 떨어지란 말도 힘겨워서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정확히 한 시간. 한 시간 지나서야 종착지인 고물상에 도착했다. 귓등으로 들은 일당 만 칠백 원. 벌겋게 달아오른 할아버지의 미소를 처음 보았다.
버스타면 한 번에 도착할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최무녁을 마주칠 생각을 하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어차피 만나지도 못할 거 희망고문일 텐데도 발걸음은 진성동을 향했다.
할아버지가 건넨 보리차를 한 번에 들이켰다. 집이라 하기에도 비좁았다. 시원하게 샤워할 욕실은 물론 에어컨도 없었다. 겨울이고 여름이고 내내 깔아둔 것 같은 저 매트는 작동이라도 하는 걸까. 쥐가 시끄럽게 지나가자 소름이 돋았다. 할아버지는 새벽에 도착한 신문을 이제야 챙겨들었다. 자리에 앉아서는 비닐을 뜯자마자 바로 코앞에 던져버렸다.
“혼자서 사시는 거세요?”
“손자랑 같이. 이제 곧 올 겨.”
할아버지 위로 벽에 달린 신문 속 빼곡한 글자들 사이 정연이란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의 별명. 그러니까 정연이란 아호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탄 배 이름이었다. 태풍이 몰아붙이는 날이었다고 한다.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배가 소년들을 싣고 전쟁통 한복판에 도착했다. 퍼렇게 물든 소년들은 아무 장비도 없이 맨바닥에 발을 디뎌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 모래를 파고 또 팠다. 총알을 피해 몸을 수그렸다. ‘여러분이 희생함으로써 나라를 구할 수 있습니다.’ 이제야 그 말의 뜻을 이해했다. 바닷물에 가라앉은 친구들을 지켜내기엔 아무 힘이 없었다. 몰아붙이는 태풍이 배를 좌초시켰고 철수 계획도 뒤틀려버렸다. 얼마나 살아남아야 했을까.
“나 같은 거 취재해서 뭐 혀. 옛날이야 용사니 영웅이니 찾아왔다지만 지금은 사람도 떠나고 친구도 떠나고 여서 남아가지고서 리어카로 전전허는 거지.”
컵에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시퍼런 새벽의 진성동 계단은 보이지 않았다. 초저녁으로 물든 마지막 노을이 불규칙한 계단을 비추고만 있었다. 이 동네 언덕에 남은 유일한 주민은 할아버지 댁뿐이었다. 훈장처럼 매달린 액자에는 20년도 더 된 오랜 기사가 할아버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 신문은 더 이상 할아버지의 지금에 주목하지 않는다. 단지 쌓이지 않는 싱싱한 신문만이 할아버지가 살아 있음을 알려줄 뿐이었다.
신문 마지막 문단에서 진짜 할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했다.
“북한군에 맞서 위장전술에 성공한 이들 학도병은 군번도 계급도 없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50년이 흘렀다. 현재 참전유공자 예우를 명목으로 지급되는 참전명예수당만 1인당 월 6만5천원 수준이다. 배 이름을 자신의 아호(雅號)로 삼은 최인호 씨는 ‘지금도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면서 쓰러지는 전우들 모습에 말문이 막힌다’고 밝혔다.”
할아버지는 온몸의 힘을 벽에 실어 한 숨을 돌렸다. 곧은 목으로 서 있는 어린 시절 사진이 노을에 그을렸다. 그 아래 할아버지가 숨을 고르고 있었다. 신문은 배경이 되어 할아버지의 호를 가리켰다.
“아이고 좋아라.”
희생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전쟁터에 내몰린 학도병에서 가난이라는 이름으로 새벽에 내몰린 지금의 할아버지 앞에서 혼란스러워졌다. 믿을 수 없었다. 언니가 말한 인터넷 어디에도 없다던 글을 여기에서 발견한 것 같았다.
“최문혁.”
짙은 노을에 묻혀 서늘함이 감도는 방 한편 액자 속 최문혁을 발견하고는 그 이름을 속삭였다. 그토록 찾아 헤맨 최문혁은 액자에서 웃고 있었다.
“그때도 이 저녁 노을 앞에 서서 이름을 지어줬지.”
글월 문, 밝을 혁. 밝은 빛을 새기며 살라는 뜻에서 지어준 이름 최문혁. 비록 자신은 져가는 노을의 끝자락에 서 있지만 손자만큼은 새벽녘 밝은 빛이 되기를 바랬다고. 그래서 가슴 따뜻한 해질녘으로 다시 이름 지어줘도 좋다는 할아버지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메라를 꺼내고 초점을 맞추자 할아버지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바깥에서 기척이 들렸다. 최문혁이 서 있었다.
“싫어.”
“학보사 들어오면 보충 안 째도 된다니까. 내년에도 담임이 빼줄 것 같아? 취재한다고 계획서만 가라로 써 내면 돼. 학보사 들어오면 하는 거 없어. 어차피 영상 쪽 비는 거라 가끔 촬영만 해주면 돼. 그리고, 그리고…. 학보사 장학금이면 너 밤늦게까지 알바 안 해도 돼.”
“신경 꺼.”
최무녁. 최,문,혁. 최…문…혁…. 오늘따라 히읗이 거칠게만 느껴졌다. 해질녘 같기는 무슨. 지 앞가림도 못하는 바보. 도와준다는 데도 자존심 부리는 것 같아 화가 났다. 화났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할아버지한테 퉁명스러운 인사를 던지고 불규칙한 계단을 성큼성큼 밟았다.
“왜 따라와!”
“편의점.”
어차피 쉬는 날이잖아. 그것도 몰랐게?
버정에 도착하고도 최문혁이 지켜보고 있었지만 앞만 쳐다봤다.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서 있다는 걸 알면서도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최문혁을 바라보면서도 자음 모음 분석하던 내가 한심했다. 그렇지만 가까운 데서 쳐다보는 것도 모자라 좋아하는 이름을 곱씹던 분위기가 가슴 깊숙한 데까지 새겨졌다. 죽어서도 심장이 떨리는 감정을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아서 슬퍼졌다. 스스로 짙푸른 새벽을 꺼져가는 노을로만 보는 것만 같아서 눈물이 났다. 속마음을 모르겠다. 바보.
무모한 취재를 마치고 언니랑 기사를 취합했다. 언니는 이제야 취재 의도를 알려주었다.
“나율아 봐봐. 너랑 나랑 이번에 취재한 진성동 3구역을 1면에 싣고 그 다음 2면, 3면 이렇게 연달아 놓을 거야. 1면에는 도입부로 해서 취재하게 된 계기, 그러니까 벌어진 문제를 인터뷰한 걸로 해서 독자들이 궁금하게 만들고. 다음 2면에서 3면까지는 낙후된 지역이라 정보 전달이 어려운 특성, 그리고 이주 명령에도 어려워하는 이유 등등. 이번에 고생한 만큼 확실한 것도 없어. 신문 배달이 힘들다는 건 정보 전달이 어렵다는 것과 같으니까. 기획이니까 다음 호에선 우리 또래들이 있는지도 찾아보고 기사로 내면 좋을 것 같아.”
이제 배달 나갈 일은 없다. 바쁘게 사느라 진성동 3구역을 놓으려는 순간. 메시지 하나가 불규칙한 계단을 뛰어 오르게 만들었다.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하 씨. 이놈의 계단은 이따구로 만들었어!”
숨을 헐떡거리며 캔버스 신발이 뜯어질라 화풀이만 했다. 어둑해지는 계단이 그저 미워 죽겠다. 위를 바라보았다. 달이 보이는 하늘을 보면서 눈물을 닦았다. 최문혁이 할아버지를 업고서 내려오고 있었다. 숨 쉬는 것도 버거운 최문혁에게 바짝 붙었다. 터벌터벌 내려오는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할아버지의 신발이 떨어져 나갔다. 얼른 주워다가 뒤쫓았다. 택시는 가까운 병원으로 질주했다.
돈 많은 사람은 시간도 산다는 말이 떠올랐다.
오늘은 새벽녘
어쩔 땐 저녁녘
이름만 보면 거친
최문혁만 보이지만
입으로 굴려보면
부드러운 최무녁
난 새벽부터 뛰는
최무녁으로 보는데
남들은 이제 곧 질
저녁녘으로 대한다
그래서 화가 난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사진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온몸을 벽에 기대어 숨 쉬던 그 순간이 되살아났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사진이 아닐 거라 믿었다. 처음으로 쓰고 싶은 감정을 느꼈다. 뭐라 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꼭 쓰고 싶게 만드는 것들이 아른거린다. 무엇이든 쓸 수 있다가도 자신감을 잃었다.
최문혁이 떠올랐다. 이 글이 최문혁을 힘들게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단순하지 않았다. 세상 어디에서는 버스를 타고 등하교 하지만 누군가는 택시비조차 없어서 아픈 할아버지를 업고 뛰어 다닌다. 그래서 인스타, 에스크처럼 아름답게 포장된 동네로 숨는 걸지도 모르겠다.
최문혁한테 허락을 받아야했지만.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다 지워버렸다.
내가 상대하기엔 너무 어려웠다. 그렇지만 말하고 싶었다. 말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어이가 없다. 힘들게 살고 있다. 여기에도 사람이 산다. 도와줘야 한다. 사람들이 몰라준다. 노을빛이 예쁜 동네다. 계속 기억이 난다. 새벽녘처럼 빛나는 너. 그래서 좋아한다고 널.
글을 쓰려면 뭐부터 해야 하지? 그냥 할아버지하고 있었던 일을 쓰면 될까? 그런 것도 기사일수 있을까? 언니한테 물어볼까? 우선 쓰고 싶은 글을 몽땅 털어놓기로 했다.
학보사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나긋하게 굴리는 너의 이름.
“최무녁.”
손에는 흰 종이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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