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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사설

[사설] ‘졸린 꿈’이 깨자 일상으로 돌아가는 靑春들

입력 : 2019. 08. 04 | 수정 : 2019. 08. 09 | C13

 

2017년 11월 14일 발표한 이 곡 ‘졸린 꿈’은 사회의 모든 가치와 존재가 파편화되고 갈라지는 시대에 태어났다. 양성 갈등, 세대 분열, 각자도생, 이데올로기, 포퓰리즘, 갇힌 사회, 폐쇄 집단, 공동체 부족화(化), 취업전선(戰線), 과거회귀, 무엇이든 양분되고 자신의 이익에 충실한 현대를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우리가 디딘 이 땅 사회와 내면의 세계, 심지어 시간조차 일상과 특별한 시간(카이로스)으로 갈라져 첨예하게 파편화되고 갈라진 틈 사이에 시대의 권력과 자본, 의욕과 희망을 잃은 채 우리 청춘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청년 멘토로 등장한 이들은 인생이란 이런 것이며 꿈을 위해 직장을 포기하고, 나 자신이 되기 위해 무엇이든 버리라고 가르치지만 정작 남의 꿈을 먹은 또 하나의 괴물과 다르지 않았다. 파편화 된 청춘을 위한 정책 수립이 쉽지 않은 듯 운동권 세력과 386세대는 권력을 놓지 않으려 아등바등한다. 늙어버린 국회 정상화는 시급한 과제로 떠올라 84일 만에 자유한국당이 복귀해도 김대중 정권 이후 최장기 멈춰선 국회에 어느 청춘도 기대를 걸지 않는다. 교회라고 다르지 않다. 청춘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라 꾸준히 외우고 읊은 구절이 우습게 보이듯, 지금 대한민국 청춘은 창조주 위에 건물주가 날아다닌다는 자명한 농담을 가리킨다. 청춘을 가져다 바쳐도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보상도, 성취도 아무 남는 것 없이 교회는 천국으로 기만한다. 유튜버로, 아이돌로, 공무원으로, 힐링(healing)과 번 아웃(Burnout Syndrome)이 조류로 등장한 지도 오래다. 대한민국 청춘은 각자도생(各自圖生)으로 얼룩져 있는 것이다.

시간이 멈추고 이 꿈이 깨이지 말아 달라 소원을 빌자 그 뒤로 별똥별이 스러지듯 지면 아래 떨어졌다. 연인의 어깨에 기댄 채 동화책을 읽어주듯, 청춘을 일군 옛날 옛적 추억의 동화를 무대에서 낭송하자 팬덤은 손뼉 치며 응원봉을 흔들었다. 이곳저곳 나눠진 망원동 연습실서 살아온 이들이 느낀 슬픔도 같을까,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았다면 나쁜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 소감을 밝힌 케이의 눈동자가 팬덤에게 잊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새겨졌다. 조각으로 나눠진 시대의 아픔과 애환으로 얼룩진 소녀들은 조각조각 갈라지고 만 각자도생 대한민국 청춘을 향해 “이 노래를 바친다.” 꿈속 어딘가 노래 접한 이들은 갈라진 인터넷 어딘가에 고맙다는 글을 남긴다. 연예인이 되어 평생을 웃게 해줄거란 고백에 다시금 살아갈 힘을 얻었다며 고마운 존재로서 러블리즈를 호명한다. 이제 막 꿈에서 깬 청춘들은 자신의 삶을 지킬 힘을 이들에게 얻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아이돌이 청춘에게 위로를 건네는 시대라니.

언제든 깨어야 할 꿈이란 걸 잘 알듯, 언제든 자기에게 기대라고 말한다. 소녀로 보이는 이들이 무슨 힘을 가지고 있겠나. 언제든 힘없이 스러질 소녀란 걸 잘 알 듯, 고마운 기억은 감정에 멈추지 않은 채 또 다시 주체적 힘으로 살아갈 새 힘으로 나타나 오늘의 졸린 꿈을 잊지 않겠다고 말한다. 언젠가 청춘이란 이름으로 흩어진다 할지라도, 이름 모를 청년으로 호명된다 하더라도, 청춘의 시대가 접어들어 어디로 갈는지 몰라도, 겁먹지 않겠다는 고백과 함께 지금의 어처구니없는 시대를 졸린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다. 답을 알 수 없고 보편적 진리는 없는 것 같아도 정의롭지 않은 일에 정의롭지 않다고 외치며 사랑하는 일에 사랑한다 외치는 용기를 안으며 작금(昨今)의 시대를 잊지 않은 채 러블리즈에 열광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들과 2019년 8월 4일을 살아가고 있다.